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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거제시조選-211」김현길 '요즘 보기 드문 사람'

기사승인 2024.03.29  09:5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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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거제시조選-211」

요즘 보기 드문 사람
 -거가 자동차매매상사 김경덕 사장

                 

 

 

 




    김  현  길
     푸짐한
     몸집부터
     상대를 압도한다
     내가 팔십 킬로 대면
     그는 백 킬로 대다
     김사장
     차바퀴가 중 머리다
     생명이 위험하다.

     내 사정
     들어보더니
     공짜로 갈아 줬다
     그 차가 중도에 퍼져
     할 수 없이 폐차했다
     투산 차
     또 외상 달아놓고
     뻔대거치 타고 있다.

시인상세프로필 
▲김현길
1956년 거제 둔덕 출생/진주교대 대학원 졸/2005년 시사문단 시 등단/2013년 수필시대 수필 등단/2014년 현대시조 시조 등단/한국문협회원. 경남문협회원. 국제펜클럽회원/거제시조문학회 직전회장/시집:「홍포예찬」「두고 온 정원」「나의 전생은 책사」/시조집 : 「육순의 마마보이」 「봄날의 뒤란」/수필집 : 「비에젖은 편지」/장편소설 : 「임 그리워 우니다니」

◎지족(知足)
 나는 식탐은 별로 없으나 돌 욕심은 많은 편이다. 아니 많은 편이 아니라 돌탐이 중독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돌 중에서도 장작개비같이 가늘고 긴 돌을 보면 환장을 하는 정도이니 다한 말이다. 출퇴근길은 명진터널을 통과하는 코스다. 예전엔 구천댐을 지나는 길이었기에 불편하였으나 명진터널 개통으로 해서 20여 분 거리가 10여 분으로 단축되었다. 좋아한 나머지 ‘명진터널’을 ‘명보터널’이라 부르며 자축했다. ‘명보터널’은 내 이름 끝 자를 붙여 부른 것이니, 듣는 이마다 같이 웃어 주었다. 
 터널 길목 경사진 곳에 몇 개의 밭뙈기가 있는데 밭 주인이 밭 뚝을 잔돌들로 말끔하게 정비하고선 한자 반 크기의 장작개비 같은 돌을 세워 놓았다. 장식으로 세워 놓은 돌이련만 그곳을 지날 때마다 눈이 갔다. 천여 점의 미니 장가계를 제작하면서 수없이 만진 길쭉한 돌이련만 남의 밭둑의 입석에 눈이 가다니, 아서라 하고 자책했다. 아흔아홉 섬을 가진 사람이 남이 가진 한 섬을 백 섬 채우려고 탐낸다고 하더니 나 또한 그 꼴이다 보니 부끄러울 수밖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와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을 잇는 혜음령(惠陰嶺)이란 고개가 있다. 옛날에는 한양에서 개성이나 평양, 의주 등 서북쪽을 가려면 벽제역을 거쳐 혜음령을 넘어야 했다. 한 마디로 요충의 길목이었다. 숲이 우거지기도 했고 값진 물건을 지닌 행인도 많고 보니 도둑들도 극성을 부렸다. 그 혜음령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두 도적 이야기가 있다. 옛날 두 도적이 고개를 넘던 사람들을 해치고 도적질을 해 빼앗은 장물들이 더 이상 숲에 숨길 곳이 없을 만큼 많아졌다. 그러자 두 도적은 혼자 장물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죽일 생각에 골몰했다. 물론 장물을 반씩 나누어도 충분했지만 두 도적은 그것을 나누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둘 다 서로를 죽일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어느 날 한 도적이 술을 사러 갔다. 실은 독이 든 술을 사러 간 것이다. 그러자 다른 도적은 이때다 싶어 그가 돌아오면 단칼에 베리라 마음 먹고 칼을 갈았다. 결국 독이 든 술을 갖고 오던 도적은 숲에 숨었다가 달려든 다른 도적의 칼을 맞고 목이 날아갔다. 하지만 그렇게 칼을 쓴 도적 역시 장물들을 독차지하게 된 것에 들뜬 나머지 흥에 겨워 무심결에 독이 든 술을 마시고 말았다. 결국 그 역시 죽었다. 족함을 모른 두 도적은 모두 죽고 말았다. 지족(知足)은 분수를 지켜 만족함을 앎이다. 족함을 모르는 것은 병 중 가장 큰 병이다. 족함을 아는 것은 심신이 온전할 수 있는 바탕이라 하지 않던가.

   족함을 모르는 일 병 중에 큰 병이다
 
   아흔아홉 섬을 가진 자가 백 섬을 채우고자
   남이 가진 한 섬을 넘 본다고 하지 않던가베
   족함을 아는 것이야말로 행복해지는 최고의
   비결일 진데 자고로 족한 마음에 크고 작은
   복이 깃든다고 이르고 또 일렀으니

   심신이 온전 하려면 족함을 알 일이다.
                   拙詩 ‘知足’, 전문

 혜음령은 아픔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 임란 당시 선조가 의주를 몽진(蒙塵)할 때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맞으며 혜음령을 넘는 장면이 나온다. 대패한 벽제관 싸움에서도 등장하는 혜음령이다. 환향녀(還鄕女)라는 슬픈 사연도 있었다. 1637년(인조 15년)에 1년간을 끌었던 병자호란이 종결지어지자 조선 전국이 청나라 군사들에게 유린당하고 부녀자들은 수도 없이 능욕을 당했으며, 약탈과 살상 또한 그 수를 셀 수도  없는 참혹한 전쟁이었다. 청군은 돌아가며 인조의 세 아들,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볼모로 끌고 갔다. 많은 조선의 젊은 여자들도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나서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많은 조선의 남녀 포로들을 대동하고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포로들을 데려오는 데는 봉림대군의 공이 매우 컸다고 한다. 혜음령 인근에 보광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을 조금 지나면 세음정(洗陰井)이라는 우물이 있는 마을이 있다. 귀향 중 혜음령만 넘으면 꿈에 그리던 한양 땅인데 갑자기 한 여인이 울음을 터뜨렸다. 한 여인이 울음을 터뜨리니 연이어 그 울음은 통곡으로 변해 때아닌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놀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연유를 묻자, 한 여인이 울음을 삼키며 털어놓은 사연은 이러했다.

 이미 8년씩이나 청나라에 잡혀 있었으니, 몸은 버릴 대로 다 버려 더러워진 이 몸으로 어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며 차라리 이곳에서 자진하고 말겠다며 다시금 통곡을 한다. 그리고 이어진 통곡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여인들도 합세하여 덩달아 우니 그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에 당황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급히 파발을 보내 아버지 인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접한 인조는 몹시 괴로웠다. 자신과 신료들이 무능하고 못나 죄 없는 백성들이 입은 폐해를 생각하니 참으로 괴롭기가 이를 데 없었다. 장고 끝에 인조는 결단을 내렸다. “금번 귀향하는 환향녀들은 비록 몸은 더럽혀져 있을지 모르나 그들 또한 짐의 백성인지라 그곳에 있는 물로 몸을(여기서 몸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킴) 깨끗이 씻고 귀향하도록 하라. 또한 이들의 각 가정에서는 이들을 절대로 박대하지 말고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라.”라는 어명을 내리게 되었다.
 
인조의 어명을 받은 여인들은 앞다투어 그곳에 있는 우물가로 몰려가서 자신의 더럽혀진 몸을 닦고 또 닦아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이 우물을 여자의 음부를 닦은 우물이라 하여 세음정(洗陰井)이라 불렀다. 오늘날 행실이 곱지 못하고 바람이나 피우고 다니는 여자들을 일컬어 화냥년이라고 하는 말은 환향녀에서 생겨난 말이다. 이 말을 퍼뜨린 사람들은 당시의 정치인이나 남자들이었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뒤집어씌운 못나 터진 사람들, 과연 이 불쌍한 여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다시는 이런 역사는 되풀이되어서는 될 일이 아니건만. 
(이후 다음 주에 계속)


감상

능곡이성보시조시인 계간현대시조발행인

시조 작품 <요즘 보기 드문 사람>은 거가자동차매매상사 김경덕사장을 두고 ‘요즘 보기 드문 사람’이라 題하여 2수 연작으로 읊은 김현길시인의 작품으로 중고차를 외상으로 가져가고선 독촉하지 않는 고마움을 에둘러 읊었다.

 작년 초의 일이다. ‘빵’하는 크락션에 쳐다보았더니 제법 그럴싸한 새 차의 문을 열고 시인이 내렸다. 경적 소리는 새 차를 자랑하기 위함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한편으론 내 고물차에 대한 약 올림 이란 생각도 들었다. 시인은 달포 전에 「봄날의 뒤란」이란 題한 두 번째 시조집을 상재 했다. 이 시조집에 〈평택으로 돈 벌러 간 아내〉가 실려 있다. 이 작품은 금요거제시조선에도 소개된 바 있다. (금요거제시조선 147회) / 살기가 힘들어서 마누라가 돈벌러 갔다 // 안전모 쓴 웃고 있는 사진을 보내왔다 // 보다가 눈물이 핑 돌아 휴지통을 찾는다 // 어제는 목쉰 소리로 코로나에 걸렸단다 / 덜커덕 겁이나서 그만 내려오라 했다 / 아침밥 누룽지 데워 놓고 우두커니 서 있다. /누룽지 데워 놓고 우두커니 서 있는 시인,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실감한다. (부잣집에서는 뒤웅박에 쌀을 담아두고 가난한 집에서는 여물을 담아 둔다. 그러므로 뒤웅박이 어떤 집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뒤웅박의 쓰임새가 달라진다는 데서 연유했는데 여자 팔자는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푸짐한 몸집의 자동차매매상사 사장에게 반질반질하게 너무 닳은 차 바퀴를 중머리 같다며 생명이 위험함을 호소 했것다. 그러자 김사장은 딱한 사정에 동정심이 일어 공짜로 타이어를 갈아 주었다. 갈아주면 뭐 하나, 중도에 퍼져버렸는데, 도리없이 폐차했다. 새 차 같은 투산 차를 또 외상으로 달아놓고 뻔대 같이 타고 있단다. 뻔대는 ‘뻔뻔한 사람, 철면피’의 유래다. 뻔대 같이 타고 있다고 실토하니 미안한 줄은 아는 모양이다.

 세계 제일의 경영자이자 엄청난 부호로 이름을 날린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의 사무실 화장실의 벽면 한편에는 어울리지 않게 볼품없는 그림 한 폭이 걸려 있었다. 그 그림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림 솜씨가 뛰어난 작품도 아니었다. 그림에는 커다란 나룻배에 노 하나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카네기는 그 그림을 보물처럼 아꼈다. 그 이유는 춥고 배고팠던 청년 시절에 그 그림을 만났다는데 그림 속 나룻배 밑에 화가가 적어 놓은 다음 글귀를 읽고 희망을 품었다고 한다. “반드시 밀물이 밀려오리라, 그날 나는 드넓은 대양으로 나아 가리라.”
 카네기는 그 글귀를 읽고 ‘밀물’이 밀려올 그날을 기다렸다고 한다. 비록 춥고 배고픈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그 글귀는 카네기가 시련을 극복하는데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적인 부호가 된 카네기는 자신에게 용기를 심어준 나룻배 그림을 고가에 구입해 화장실 벽에 걸어 놓은 것이다.

 외상 차를 뻔대 같이 타고 있다는 시인, 이 작품을 김경덕 사장이 본다면 더더욱 외상값 독촉을 못 하지 싶다. (그런 시인의 속셈이 읽힌다.) 시인에게도 카네기처럼 ‘밀물’이 밀려오리라 믿는다. 拙詩 ‘고물차’ 한편으로 시인의 아픔을 달래 본다.

     밟으면 잘 나가도
     그 이름은 똥차였다

     겉치레는 시간에 뜯겨
     내실 마저 집어 삼키고

     차가 곧 人生의 등급
     허리 꺾어 인사 한다.


     말끔한 새차의 꿈
     허름한 땟물로 남아

     전신에 스민 상처
     버리면 고물이 된다

     눈 뜨고 당하는 수모
     이 몰골의 이 행색.
       ―능곡 시조 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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