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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뉴스룸'이 전하는<이 사람>:'이경필 장승포가축병원장'

기사승인 2020.12.15  03:3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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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 피란선에서 태어난 ‘김치5’로서의 삶

“라루 선장, 현봉학 박사, 김백일 장군, 에드워드 포니 대령에게 감사합니다. 이분들을 널리 알리고 기리는 것이 70년 전의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온 가족이 가게 간판에 ‘평화’ 집어넣어
⊙ 푸대접받던 ‘뱃놈’이 거제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 보수·진보 이념 떠나 평화·은혜·나눔 강조

거제로 향하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상.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났다. 북한은 하루 10km씩 내려와 8월 15일에는 부산을 점령해 전 한반도를 공산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국군과 미군(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며 이 계획을 좌절시켰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늘어진 전선(戰線)을 끊어냈다. 9월 28일에는 서울을 되찾고 북진(北進)을 시작했다.
 
  10월 1일, 1군단장 김백일(金白一·1917~1951) 소장(少將) 휘하의 3사단이 38선을 돌파했다. 이날을 기리고자 10월 1일을 국군의날로 삼았다. 10월 19일, 백선엽(白善燁·1920~ 2020) 장군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이 평양을 탈환했다. 10월 26일에는 국군 6사단이 한만(韓滿) 국경선인 초산까지 진격해 압록강 물을 떠다가 대통령에게 바쳤다. 서부 전선의 압록강과 동부 전선의 두만강을 이어 북진 통일을 완성하려는 꿈은 중공군(中共軍)의 개입으로 좌절됐다.

국군이 평양을 수복하는 날, 중공(中共)의 마오쩌둥(毛澤東)은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이라는 명분으로 30만 군대를 한반도로 보냈다.
 
  중공군이 남하하자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해야만 했다. 11월 26일, 미 제10군단(군단장 알몬드 중장) 예하의 미 해병 1사단은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영하 30도의 한랭전선을 맞으며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을 향해 질서 있는 후퇴를 시작했다. 미 10군단은 흥남에서 해상으로 철수해 부산으로 간다는 계획이었다. 후퇴하는 국군과 미군을 따라 북한 주민들도 피란길에 올랐다.
 
  미국은 흥남에 집결한 병력과 물자를 후방으로 대피시키기 위해 상선(商船)까지 동원했다. 자유를 향한 대탈출에 약 200척의 배가 동원됐다. 12월 21일 길이 196m, 폭 20m, 정원 60명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선장 레너드 라루·7600t)도 흥남 부두에 도착했다.
 

 자유를 향한 대탈출, 흥남 철수 작전

숙명여자대학교에서 특강을 한 김치5 이경필 원장.

흥남에서 사진관을 하던 이석초(37)·김재남(28) 부부에겐 세 살배기 아들(군필)이 있었다. 아내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였다. 중공군이 들이닥치자 노모(老母)는 아들 부부에게 피란을 떠나라고 말했다.
 
  12월 22일 밤 9시 반부터 빅토리호는 피란민을 배에 태우기 시작했다. 부부는 곧 돌아올 것이라 믿고 배에 올랐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문용형·강한옥)도 이 배에 몸을 실었다. 다음 날(23일) 오전 11시10분, 47명의 선원과 피란민 1만4000명은 남(南)으로 가면 흥(興)한다고 믿고는 자유를 찾아 흥남(興南)을 떠났다.
 
  피란민을 실은 배는 12월 24일 부산항에 입항하려 했으나 부산은 이미 포화 상태였다. 25일 뱃머리를 돌려 거제(巨濟) 장승포(長承浦)로 향했다. 이때 배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선원은 이 아이를 ‘김치’라 불렀다. 뒤이어 ‘김치2’ ‘김치3’ ‘김치4’가 연이어 탄생했다.
 
  배가 거제 앞바다에 도착했지만, 협소한 장승포항에는 배를 댈 수 없었다. 피란민을 수송선(LST·Landing Ship Tank)으로 옮겨 태워 포구로 실어나를 작정이었다. 그때 화물칸에서 다섯 번째 김치가 태어났다. 산파(産婆)는 김재남과 김치5 이경필을 잇던 탯줄을 이로 잘라냈다. 거제에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1만4000명을 포함해 피란민 9만1000명이 몰려들었다.
 
  — 몇 시에 태어났나요.

 “정확한 시각은 어머니도 기억을 못 하세요. 장승포에 막 도착했을 때입니다. 오전 10시에서 12시 사이 됐을 겁니다.”
 — 1만4000명이 배에 올랐는데 내릴 때는 1만4005명이 된 거네요.
 “흥남에서 피란민을 배에 태울 때 라루(Leonard LaRue·1914~2001) 선장은 사무장 로버트 러니(J.Robert Lunney·93·당시 일등 항해사)에게 ‘1만명까지 카운팅하라’고 했어요. 1만명을 돌파하고는 1만2000~1만3000명까지 세다가 더 세는 것을 포기했다고 하더라고요. 어림짐작으로 1만4000명이 탄 거죠.”
  — 12월 24일 부산항으로 들어갔다면, 배에서 태어날 일도 없었겠네요.
  “그렇죠.”
 — 부모님이 할머니에 대해선 별말씀을 안 하셨나요.
 “할머니는 부모님께 ‘일주일이면 전쟁이 끝날 테니, 미군 따라 다시 돌아오라’고 하시곤, 이북에 남으셨대요. 해방 후에 소련군, ‘로스케’가 약탈을 했잖아요. 그때 기억 때문에 집을 지키려고 한 거죠. 다시 못 돌아갈 줄 알았으면 할머니도 그때 모시고 내려왔겠죠.”
 — 피란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버지는 죽었을 것이라고 하셨죠. 이모부가 노농적위대 활동을 했는데, 피란을 가라고 했답니다.”
 
 
평화사진관·평화상회·평화식당·평화가축병원

김치5를 상징하는 엠블럼. 평화를 상징하는 백조 모양에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모양을 가져왔다. 다섯 번째를 의미하는 손가락 모양도 눈에 띈다.

이석초는 카메라 2대를 챙겨 빅토리호에 올랐다. 거제도에 정착한 후에는 사진관을 차렸다. 이름은 평화사진관. 얼마 뒤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생겼다. 피란을 온 지 1년쯤 지나 이석초는 포로수용소 경비로 징용됐다. 문 대통령의 아버지(문용형)도 포로수용소에서 경비를 섰다고 한다.
 
  이씨는 포로들과 친하게 지냈다. 포로들이 입던 옷을 모아다 아내에게 전하면 아내는 이 옷을 수선하고 검은 물을 들여 부산의 구제시장(부평/깡통・국제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렇게 번 돈으로 다시 고무신과 양초를 사 들고 거제로 들어왔다. 평화상회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69학번인 이경필씨는 피란민이 주축이 된 해성고등학교를 나와 경상대학교 수의학과를 졸업했다. ROTC 11기로 강원도 철원에서 복무했다.
 — 왜 수의사가 됐습니까.
 “평화상회를 하면서 양계장도 했습니다. 300마리로 시작해 7000마리까지 늘렸죠. 3000평 규모로 거제도에서 제일 컸습니다. 원래 아버지는 제가 군인이나 공무원이 되길 바라셨는데, 고등학교 때 태풍이 오는 바람에 닭 7000마리를 모두 잃었죠. 급하게 닭을 돌볼 수의사가 필요했어요.”
 대학교 1학년 때는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닭 7000마리를 또 잃었다. 더는 양계장을 유지할 수 없었다. 1975년 7월, 철원에서 거제로 다시 내려와 평화가축병원을 열었다.
 — 지금은 장승포가축병원이 됐네요.
  “아버지가 ‘전쟁하지 말자’는 의미로 ‘평화’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손가락으로 다이얼을 돌리는 전화기를 썼잖아요. 114에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시대였는데, ‘평화’라는 이름을 촌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못했어요. 생경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알기 쉽게 ‘장승포’라는 지명을 넣으려고 했죠. 병원 이름을 바꾸려고 하니, 아버지가 ‘내 죽거든 바꾸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6개월이 지나서야 이름을 바꿨죠. 아버님은 ‘이름은 바꾸더라도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이경필 원장이 운영하는 장승포가축병원.

거제에는 동물병원이 12개 있다. 오직 이씨의 장승포가축병원만이 대가축, 소·돼지·염소 등을 다룬다. 요즘 수의사들은 개나 고양이 위주로 배우고, 소나 돼지는 배우지 않는다고 한다. 이경필씨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그 반대였다. 이씨는 휴대전화를 종일 곁에 두곤 전화가 오면 언제든 왕진을 나간다. 소의 난산(難産)은 때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씨가 처음 가축병원을 열 때만 해도 섬에는 소 1만2000마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2000마리 정도 있다. 어업을 하는 이는 전체 인구의 10분의 1가량 된다고 한다.
 그의 형 군필은 비둘기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이후 조선소에서 일했는데, 고엽제 후유증을 앓았다. 나이 마흔을 넘겨 조선소를 그만두고는 식당을 차렸다. 식당 이름도 평화식당이었다. 이석초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지난 뒤 군필도 세상을 떠났다. 이경필씨는 자기 밑으로 남동생 덕필과 여동생 영애를 뒀다.
 — 피란민이라고 차별을 받지 않았나요.
 “국민학교에 들어가니 형뻘 되는 사람이 ‘뱃놈, 뱃놈’이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이북에서 피란 왔다는 걸 알게 됐죠. 피란민들은 푸대접을 받을까 봐 이북 출신이라는 걸 밝히지 않았어요. 거제도는 윤씨·옥씨·신씨로 이뤄진 씨족사회입니다. 지금이야 김치5라고 말하고 다니지, 예전에는 생각도 못 했죠.”
 
  1970년대 들어 거제도에 조선소(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가 들어서고 외지인이 늘자 원주민의 텃세도 줄어들었다. 지금은 이북 출신과 원주민 간의 사이가 괜찮다고 한다.
 2005년에야 이경필씨는 자신이 ‘김치들’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 방송사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중 미국 측 자료를 살피다 김치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김치라는 이름은 빅토리호의 사무장 로버트 러니가 지었다.
 
  김치1 손양영씨는 서울에 살고 있다. 김치 2~4의 정확한 소재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김치3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미국에 산다고 알려졌으나, 그의 출생일은 12월 25일이 아닌 26일로 신고돼 있다고 한다. 음력으로 생일을 치르던 시대에도 이경필씨는 성탄절에 생일을 챙겼다.
 
  
피란민이 사는 방식 두 가지

현봉학 박사 동상 앞에 선 김치5(왼쪽)와 김치1 손양원씨(오른쪽).

피란민이 거제도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2가지였다. 공부하거나 장사를 해야 했다.
  “당시 흥남은 우리나라 최대 공업도시로 인재가 많았어요. 피란민들은 농사지을 줄도 몰랐고, 땅도 한 평 없었죠. 대신 부모들은 장사해서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어요.
 원주민들은 배만 타도 돈을 벌 수 있으니 굳이 자식에게 공부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때였어요. 장사라는 개념도 없었죠. 나중에는 피란민들이 너무 잘되니 거제 사람들이 자격지심을 가졌죠.
 
  전쟁통에도 이북 출신들은 학교에 갔어요. 이때 만들어진 학교의 교사는 대부분 피란 온 이들이었죠. 부모들은 유대인처럼 장사했죠. 돈을 벌어 서울로 올라갔어요.”
 — 거제도가 흥남보다 나은 점이 있나요.
 “여기가 살기 더 좋죠. 겨울이면 흥남은 영하 20도, 여기는 영상 9도입니다. 1년 내내 ‘난닝구(러닝셔츠)’만 입고 살아도 되죠. 피란민들이 겨울에 천막만 치고 산 것도 거제도이니 가능했어요. 전부 바닷가이니 먹을 것도 많죠. 대신 파도가 치고 날씨가 안 좋으면 바다로 못 나가요. 먹을 게 없으니 산에 올라가 독초를 풀인 줄 알고 먹어 죽은 이들이 많았죠.”

피란민이 섬으로 몰리자 1951년 세브란스병원 장승포 분원이 생겼다. 사지에서 피란민들을 구출한 현봉학(玄鳳學·1922~2007) 박사가 힘을 썼다. 현 박사는 1941년 함흥고등보통학교를 나와 194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세대 전신)를 졸업하고 1947년 미국 유학을 했다. 1950년 3월 한국으로 돌아와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던 중 전쟁을 맞았다.
 
  현 박사는 미 10군단의 민사부 고문으로 활동하며 통역을 맡았다. 관객 1300만명을 동원한 영화 〈국제시장〉의 초반부에는 한 젊은 남성이 미군 장군을 설득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바로 이 젊은이가 현봉학 박사다.
 2016년 12월 19일 서울역 앞 세브란스빌딩 앞에서 열린 현봉학 박사 동상 제막식에는 당시 문재인 민주당 대표도 참석했다. 문 전 대표는 현봉학 박사와 흥남 철수 작전이 없었더라면 자신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현봉학 박사의 어머니 신애균 여사는 거제도에 대광중학교 분교와 일맥원이라는 고아원을 세웠다. 서울 서초구 사랑의교회 설립자인 옥한흠(玉漢欽·1938~2010) 목사가 대광학교를 다녔다.
 이경필씨는 대학 시절과 군 복무 시기를 제외하곤 거제를 떠난 적이 없다.
 — 왜 거제에 정착하셨습니까. 아버님의 뜻입니까.
 “아버지는 ‘거제를 떠나지 말라’고 하신 적이 없어요. 다만, ‘우리 가족을 품어준 거제에 은혜를 갚으라’고 하셨지요. 그러다 보니 거제에 정착하게 됐죠.”
 

 큰아들은 공군 조종사

이경필씨와 부인 옥정희씨

이경필씨는 초등학교 동기인 아내와 결혼해 아들만 둘을 뒀다. 큰아들은 공군사관학교 49기로 임관한 조종사다. 지금은 중령으로 비행대대장을 맡고 있다. 작은아들은 서울에서 광고홍보회사를 다닌다. 둘째 며느리는 방송사 PD다. 손녀 둘에 손자 하나를 뒀는데, 큰손녀가 초등학교 2학년이라고 한다. 2010년에는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큰아들과 함께 미국에 가서 오바마 대통령도 만났다. 자신을 배에서 받아준 산파의 손녀도 만났다. 시애틀에선 김백일 장군의 부관과도 이야기를 나눴다.
 — 2011년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 김백일 장군 동상을 세울 때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흥남철수기념사업회에서 김백일 장군 동상을 세운다고 할 때 저는 반대했어요. 분명 동상을 반대하는 이들이 들고일어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김백일 장군이 수모를 겪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만난 김백일 장군의 부관은 김백일 장군이 민주주의자였다고 표현했습니다.”
 김백일 장군 동상을 공원에 건립할 때 현장에 참석해 테이프까지 자른 거제시장은 갑자기 입장을 바꿔 동상 철거를 주도했다. 이경필씨는 동상을 철거하려는 좌파 시민단체에 맞섰다. 거제시를 상대로 소송까지 벌였다. 2013년 대법원은 동상을 존치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시민단체는 김백일 장군 동상 옆에 동상보다 큰 ‘김백일친일행위단적비’를 세웠다.
 
  김백일 장군과 현봉학 박사는 알몬드 장군에게 ‘흥남 부두에 모인 피란민을 후방으로 수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초 철수 작전은 병력과 군수물자를 후송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기에 알몬드 장군은 피란민을 수송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1군단장 김백일은 미군이 피란민을 태우지 않으면 국군 1군단도 수송선에 타지 않고 피란민을 엄호하며 육로로 퇴각하겠다고 했다. 여기에 포니 대령까지 나서 알몬드 장군을 설득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피란민 9만1000명은 사지(死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김백일 장군은 1951년 3월 28일 강원도 대관령 인근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서른넷 나이로 순직했다. 이후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고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중국에 고철로 팔려 간 ‘메러디스 빅토리’호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라루 선장.

 2004년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배’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러나 이에 앞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이미 1993년 중국에서 고철로 분해되고 말았다. 흥남철수기념공원 조성에 앞장서는 이경필씨는 “메러디스 빅토리호 대신 레인 빅토리호(SS Lane Victory)라도 국내로 가져와 기념공원에 전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1945년 건조된 레인 빅토리호는 6·25전쟁 당시 원산항에서 7009명의 피란민을 싣고 부산으로 왔다. 1988년에는 미국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전우회가 이 배를 인수해 로스앤젤레스 인근 산페드로항에서 역사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현재 경상남도와 거제시는 흥남철수기념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쳤다. 장승포항 여객선 터미널 일대에 1만 평 가까운 땅도 마련해뒀다. 공원 조성을 위한 설계를 시작했고, 공기(工期)는 2년으로 2023년 개장이 목표다. 미국에서 배만 가져오면 공원은 계획대로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
 
  문제는 레인 빅토리호를 부산시도 가져오려고 한다는 점이다. 부산시는 레인 빅토리호가 부산항에 입항했으므로 부산에 오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레인 빅토리호 국내 인수가 논의되자 북한은 ‘매국 배족적 행위’라고 주장했다. 남아 있는 레인 빅토리호를 거제에 둘지 부산에 둘지에 앞서, 이 배를 국내로 가져오기 위해선 여러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씨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이 아닌 국가가 나서 이 배를 국내로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흥남 철수 작전과 문재인 대통령의 인연 때문인지 문 대통령의 복심(腹心)인 김경수 경남지사가 흥남철수기념공원 조성사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1953년 거제시 거제면 명진리 남정마을에서 출생했다. 여섯 살이 되는 해에 부산 영도로 이사했다. 문 대통령의 산파는 거제의 한 요양병원에 있다고 한다.
 
 
평화・나눔・은혜

왼쪽부터 김치5 이경필 원장, 로버트 러니 사무장, 옥영태씨.

이경필 원장과 이야기하던 중 옥영태(66)씨가 병원으로 들어왔다. 그는 kimchi5 평화통일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옥씨는 자신을 8년 전부터 이씨의 매니저이자 수행비서를 맡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 생가 근처에서 건어물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 가게는 아내에게 맡겨두고 주로 이경필 원장과 함께한다.
 
  ‘곧 있으면 흥남철수작전 70주년입니다’라는 말을 꺼내자 옥씨는 “매년 연말이 되면 약방의 감초처럼 ‘김치5’를 찾는데, 정작 제대로 된 대접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행사나 관련 일정이 있어 서울에 갈 때면 새벽 4시에 거제에서 출발한다. 서울에 다녀오는 날에는 가축병원 문도 닫아야 하는데, 행사에 다녀오면 차비도 남지 않는다고 한다. 매년 때가 되면 일회성 행사로만 그친다는 불만이다.
 
  옥씨는 8년 전 이경필 원장이 내세우는 가치에 감동해 지금껏 함께하게 됐다.
 이경필씨는 ‘평화’ ‘나눔’ ‘은혜’라는 가치를 내걸고 흥남 철수 작전에 기여한 이들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씨는 “정치는 잘 모르겠다”면서 “중요한 것은 우리를 구해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했다. 대학이나 지자체 등 어디서든 김치5를 부르면 이씨는 달려간다.
 
  흥남 철수 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써온 이씨는 정권과 이념에 따라 흥남 철수 작전을 기념하는 사업들이 흔들려왔다고 말한다. 이명박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이 대통령이 ‘기념공원 조성 사업이 잘 돼가는가, 잘 해보라’고 격려했지만, 정작 실무진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면서 더욱 더 ‘보수와 진보’ ‘좌우’가 아닌 생명과 은혜, 평화라는 가치를 강조하게 됐다고 말했다.

흥남철수기념공원
 이경필 원장은 문재인 대통령 당선을 전후해 두 차례 김정숙 여사를 만나 흥남철수기념공원의 필요성을 알렸다.
 “김정숙 여사를 만나 ‘우리가 전쟁이 나면 어디로 갈 것이냐’ ‘미군이 준 주먹밥, 물 한 통을 돈으로 따질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꼭 흥남철수기념공원을 만들어 고마운 사람들을 기억하고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했지요. 그러자 김 여사는 ‘전쟁은 나지 않는다’고 답했어요. 또 기념공원 조성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후 흥남철수기념공원 조성에 속도가 붙었다고 한다. 옆에 있던 옥영태씨도 사견임을 전제로, 김경수 지사가 흥남철수기념공원에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흥남철수작전 덕분에 문 대통령도 태어날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현재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도 흥남 철수 작전을 기념하는 조형물들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이씨와 옥씨는 “자유와 생명을 만들어낸 흥남 철수 작전을 포로수용소 내 작은 공간에 배치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흥남철수기념공원을 조성해 실향민들이 거제를 제2의 고향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옥영태씨는 “피란민이 1세대를 거쳐 4세대에 이른다”면서 “거제에 내린 9만여 명이 다산(多産)의 시대를 거치며 대한민국 인구 중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성탄절이 다가올수록 이씨는 바빠진다. 그는 흥남 철수 작전을 알리고, 자신을 있도록 해준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이씨는 “특히 라루 선장, 현봉학 박사, 김백일 장군, 그리고 알몬드 장군을 설득한 에드워드 포니(Edward. Forney) 대령에게 감사하다”면서 “이분들을 널리 알리고 감사함을 표시하고 기리는 것이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했다. 라루 선장은 1954년 미국 뉴저지주의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修士)로 살다가 87세에 세상을 떠났다.
 
  김치5가 유명해지자 거제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를 통해 민원을 해결하려고까지 한다. ‘뱃놈’이라고 푸대접받았던 이경필씨는 대통령을 2명이나 낸 섬 거제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 됐다.
글 :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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