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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인자 수필29]'개 화(開 花) '

기사승인 2020.09.21  05: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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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인자:수필가/수필과비평 작가회 전 거제지부장/수필과비평작가상수상

                  개   화 (開 花)                     
                                                        심 인 자

난(蘭)이 환하게 꽃망울을 터트렸다. 잎을 둘러싼 노란 테가 색칠한 것처럼 선명하다. 이런 맛에 남편은 삼백 육십오 일을 살아가는 모양이다. 난에 푹 빠진 남편이 밉다가도 꽃이 조금씩 입을 벌려 꽃망울을 터트리는 시기엔 동류인이 된다. 풋풋한 향기에 빠져든다. 이번만큼은 난이 꽃망울을 터트린 것에 축배의 잔을 높이 든다.
   몇몇의 난은 아직도 작년 여름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 새 촉은 고사하고 꽃대조차 올리지 못한 난도 있다. 녹색 잎에 기상이 서려야 하는데 대찬 기운은 어디로 갔는지 생기마저 없다. 그나마 살아준 것만도 다행이다.
   지난여름의 끝은 정말 무서웠다. 온 나라를 휩쓸었던 태풍, 매미의 상륙으로 정신을 놓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두려움이었다. 속수무책이었다. 문이란 문은 꼭꼭 걸어 잠가 놓고도 안심이 안 되어 테이프를 발랐다. 예사가 아니었다. 바람의 위력이 얼마나 센지 그 힘을 막아내지 못했다. 온 식구가 막고서야 겨우 열리는 문을 도로 닫을 수 있었다. 무서웠다. 사방에서 막아주는 건물이 없어 더 심했다.
   약할 대로 약해진 나는 본능적으로 신(神)을 찾았다. 현실 앞에 놓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제발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빌 뿐이었다. 그러나 쉽사리 떠나갈 기세가 아니었다. 이미 정도를 넘어섰다. 무자비하게 난도질하는 폭군이었다. 닥치는 대로 베고 쓰러뜨리며 온 세상을 제 손아귀에 넣으려는 듯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모든 빛이 사라졌다. 일순간에 암흑천지가 되어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웅크려 있었다. 나의 몸은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와들와들 떨렸다. 기다려야 했다. 지쳐 제 풀에 멈춰 설 때까지 우레 같은 바람소리에 치를 떨며 납작 엎디어야 했다.
   성난 폭군은 구석구석을 훑어나가며 분탕질을 해댔다. 클라이맥스다. 어느 집인지 분간이 안 갔다. 윗집인지 아랫집인지. 아니, 누구 집이랄 것 없이 전부 다 부셔지고 구르고 무너져 내리는 모양이었다. 이러다 통째 날아가 버리는 건 아닌지. 포복하고 있는 등위로 무너져 내리는 굉음소리. 그 소리는 사력을 다해 붙잡고 있던 끈을 놓아버리게 했다.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든 근육이 맥을 놓아 버렸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태풍은 온 집안을 휩쓸었다. 성한 데가 없었다. 베란다 문을 쓰러뜨리고, 육중한 거실 문까지 무너뜨렸다. 이백여 분이 넘는 난 화분에 난도질을 해댔다. 납작 눌리어진 난을 본 남편은 충격에 빠져 넋을 놓은 것 같았다. 꼬박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았다. 집 안이나 밖이나 다 엉망이었다. 멍하니 내려다본 도로에 부셔지고 무너진 파편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지붕에서 떨어진 환풍기며 부러진 가로수, 아파트를 감싸던 울타리가 생채기를 입고 누워 있었다.
   창틀을 일으켜 세웠다. 산산 조각난 유리 파편을 치우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베란다를 본래대로 회복하자면 며칠은 걸릴 것이다. 깨진 화분 조각과 산산 조각난 유리를 포대에 담았다. 한순간에 집을 잃은 난초는 벌거벗은 몸으로 대야에서 노숙했다. 귀하디귀한 대접을 받던 사피 난초도, 붉디붉어 이름 붙여진 홍화도 한데 뭉쳐져 대야에 담겼다.
   새 촉을 피워 귀염 받던 난초가 제대로 살아날지 의문이었다. 육중한 창틀에 납작 눌려 상처로 범벅된 것들이 대부분이니. 남편의 시선은 꺼져가는 생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식마냥 보살피며 쓰다듬고 아껴온 것들이 생명을 다한다는 생각에 가슴 아파했다. 그럼에도 난 오로지 ‘저들이 죽으면 얼마나 손해를 볼 것인가’에 꽂혔다.
   남편의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난분이 많이 줄었다. 절반이나 줄어 베란다 한 쪽이 휑하다. 살리지 못할 거란 불길한 생각마저 들었는데 이 만큼이라도 지켜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따뜻한 기운이 봄을 알려 왔다. 조금씩 몸을 회복한 난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며 몸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촉을 틔우는 난, 아직은 힘들지만 그래도 몸을 곧추 세우려 잎에 윤기를 보내는 난, 완전 회복되어 꽃대를 올리는 난들이 비상을 꿈꾸며 활기차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푸릇푸릇한 잎에 윤기가 자르르 흘러 한 눈에도 싱싱하고 건강해 보인다.
   남편이 당부한 대로 속삭이기 시작한다. 남들이 들으면 뭐라 할까. 그래도 팔불출처럼 칭찬에 여념 없다.
   “어젠 잘 잤어? 어쩜 이리도 꽃망울을 잘 터트렸니. 정말 예쁘네, 잘 자라줘서 고마워. 오    늘 날씨가 참 좋지? 너희들 모두 햇볕 잘 받고 맑은 공기 흠뻑 마시렴. 사랑한다.”
  처음엔 쑥스러웠다. 뭐 이런 걸 다 시키나. 시킨다고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습고 계면쩍었다. 그렇게 하면 난이 기뻐서 더 잘 자라고 꽃도 예쁘게 핀다는 것이다. 마지못해 내뱉던 말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이 건 얼마? 저 건 얼마? 돈으로 계산하며 화분 하나하나를 헤아리던 내가 어느 사이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그들을 받아들이며 보살피고 있다.      난이 깔깔대며 환하게 웃고 있다. 보통 웃음이 아니다. 보답의 웃음이다. 그 웃음이 예쁘다. 대견스럽다. 오랜 기간 인고의 시간들을 보내왔기에 값지고 귀한 웃음을 보이는 게다. 그러기까지 남편의 손길은 밤낮 없이 바빴다. 어린 아기 보살피듯 조심조심 부드러웠다. 행여 넘어지지나 않을까. 햇빛에 어지러울까. 목마르지는 않을까. 온종일 눈길은 그들에게 가 있다. 마침내 남편의 정성으로 하나 둘 꽃을 피워 내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내가 어찌 난에 대해 값을 산정하고 셈하기에 급급할 수 있을까. 욕심에 가득 찬 이기적인 시선에서 이젠 한없이 부드럽고 진한 애정이 물씬 나오는 따뜻한 눈길을 보낸다. 내 몸에서도 꽃 하나가 활짝 피고 있다.
   꽃망울을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에 내 마음을 살며시 얹는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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