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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대균 의학박사 '마산방어전투' 미25보병사단 실화번역집 발간

기사승인 2020.05.25  01:3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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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포로수용소 의무일지 번역집도 집필 중

6.25전쟁 70주년 기념 작품집 '마산방어전투' 번역기록집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240Km낙동강 방어선 이상 철수나 후퇴는 없다 '죽음으로 지켜라'
미25보병사단의 마산방어전투번역 (1950.8.1~8.31) 완성본 선보여
"마산방어전투는 가장 길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처절한 전투였다". 

의학박사 배대균 원장은 마산 3.15 의거탑 앞 사거리에 있는 배신경정신과의원의 원장이다. 의사로써의 명성만이 아니라 경상남도문화상 수상자로써 선정되는 등 문인으로서도 익히 그의 공적이나 필력을 인정 받는 분이다.  

그런 그가 반순열 전 육군소장(전 39사단장/제2군사령부 부사령관/국가비상기획위원회 기획실장)의 감수를 받고, 6.25전쟁에 자원입대해 화랑무공훈장 등을 받았던 부이사관으로 퇴임한 손담(6.25참전용사 진해지회장)의 전적지 발굴품 분류정리 등의 도움을 받아 6.25전쟁 70주년기념사업으로 '마산방어전투'실화번역집을 발간 배포했다.

배 박사는 진해에서 태어나 덕산초등학교와 진해 중.고를 거쳐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해군군의학교 군의후보생으로 입대해 해군의무관 대위로 임관 주월백구부대서 종군하고 1969년 해군소령으로 예편했다. 신경정신과와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병원을 운영하면서 국민훈장 석류장, 모란장, 총리표창, 장관표창 5회, 경남도문화상 등 많은 수상 기록도 가지고 있다.

또 번역집 '의문의강', 장진호 전투, 한국인의 문신, 수필집 '생각나는 사람들 외 7권의 수필집'을 발간하기도 한 경남 수필계의 중진이다. 미군정청이 보유하고 있는 6.25전쟁 관련 자료 원본 등을 개인적 인맥으로 입수해 번역작업을 하면서 참 많이 울기도 했다고 한다. 사랑과 평화가 무엇이길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름도 없는, 아는 사람도 없는 이국만리 한국에 와서 생명을 걸고 싸웠는지, 전우애가 무엇인지가 뼈에 사무쳤다고 적었다.

그는 6.25전쟁 중에서 가장 길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처절한 전투였던 마산방어전투를 꼭 책으로 펴내고 싶었다고 회고한다. 60일간 하루도 쉬지않고 싸운 전투에서 아군은 1천명이 전사하고, 5천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적군은 4천명이 죽고 3천명이 포로가 되는 대혈전이었으나, 6.25전쟁사에 누락되어 있어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미 25보병사단의 마산방어전투기가 미연방정부 서류저장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어렵게 자료를 확보해 3년여 동안 번역했다고 한다. 또한 거제도포로수용소 관련 자료도 미국으로부터 직접 자료를 수집해 현재 번역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

잊혀져가 는 마산방어전투를 소개하고, 6.25전사에 기록되어 보존의 장이 되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전쟁에 관한 사실중심의 딱딱한 번역집이어서 읽기가 쉽지 않지만 마산이 무너지면 부산이 함락되고 나라가 전복될 수 있는 위급한 상황에 대한 기록이어서 당시의 상황이 분명하게 회억(回憶)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산 진동리전투는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적의 예봉을 꺾고 부산 진출을 시도하던 북한군을 저지한 전투다. 이때 국군 해병대는 북한군 6사단의 정찰대대를 궤멸시키는 혁혁한 전공을 세워 전 장병이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누렸다. 낙동강 공방전이 가열되기 시작한 1950년 7월 말 북한군 6사단은 마산을 통해 부산을 점령한다는 계획 아래 호남 지역에서 대우회기동을 개시했다. 북한군 6사단은 빠르게 진주를 점령하고 마산으로 향했다. 이에 미 8군 워커 중장은 대규모 반격 작전을 계획했다. 미 25사단장 킨(왼쪽) 소장과 제8군 사령관 워커(가운데) 중장, 미 육군 참모총장 콜린 스(오른쪽) 대장이 6.25 전쟁 중 작전을 논의하고 있다.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제공
미 육군 25사단과 미 제5연대 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된 한국 해병대의 김성은 부대와 육군의 민기석 부대 등을 동원해 저지 작전에 나섰다. 진동리지구에 투입된 25사단과 그 배속부대들은 진주를 탈환하기 위해 거듭된 패주를 멈추고 개전 이래 첫 반격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 기간 중 한국 해병대의 김성은 부대는 8월 1일 새벽 고사리 지구에서 북한 6사단을 공격해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김성은 부대는 8월 3일 전차와 사이드카를 앞세우고 아군 방어진지로 향하는 적 대대병력을 공격해 전차 2대와 트럭 4대, 지프 2대를 파괴했다. 6일에는 진동리의 미 27사단에 배속돼 적에게 점령당한 야반산을 공격해 탈취했다. 12일에는 중암리(함안군 군북면)로 이동해 패퇴한 적이 집결한 오봉산과 필봉을 북에서 남으로 공격해 일부 목표를 점령하는 등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진동리전투는 유엔군의 첫 반격작전 승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약 2주의 전투 기간 동안 진동리 근처 고지의 주인이 19번이나 바뀔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다. 하지만 이곳을 지키면서 북한의 서남쪽을 통한 부산 진입 전략이 좌절됐고 이후 낙동간 방어선을 지킬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진동리전투의 승리가 있었기에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이 가능했다는 평가도 있다.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1월 하순부터 다시 북진을 시작했다. 그리고 38도선 북방의 전략도서 확보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전략도서 확보 작전은 동·서해안의 교통 요충지를 장악함으로써 아군 해군의 활동을 보장하는 게 목표였다. 해병대는 상륙부대의 특성을 적극 활용해 이 작전의 성공을 뒷받침했다.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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