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영미/ 거제수필문학회 회원/눌산문예창작교실 수료.
눌산문예창작교실에서 시문학과 수필문학을 공부하던 추영미씨(사진)가 계간문장 21 가을호를 통해 수필작품 '아버지라는 이름의 끈' '마늘과 쑥 그리고 홍합' 으로 수필가로 등단했다. `마늘과 쑥 그리고 홍합'은 작가가 어릴적부터 예쁘지고자 열망하는 순진한 마음을 담아내 빙긋이 미소짓게 한다. 아마도 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어봄직한 이야기를 재미지게 표현했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끈'은 그리움에 대한 작가의 경험담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태초의 인연에 대한 내면의 그리움을 첫 문장부터 담담하게 잘 투영해 주었다. 두 작품 모두 작가의 개성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심사평에서 좋은 스승을 통해 좋은 문학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보람있는 일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평하면서 앞으로 다양한 작품활동을 펴 나가길 기대한다고 했다 .
등단작품 `아버지의 ㅇ
아버지라는 이름의 끈
추영미
눈이 시린 쨍한 햇살이다. 한낮의 무더위가 온몸을 털로 뒤덮은 개에게는 힘든 고역일 것이다. 혀를 입 밖으로 한 치나 빼고 숨을 헐떡거리는 모습이 어린 내 눈에도 안쓰러워 보였다. 내가 살았던 마을 뒤쪽에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다. 이렇게 더운 날이면 아버지는 나와 덩치 큰 셰퍼드를 데리고 저수지로 올라갔다. “뛰어!”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지자 셰퍼드는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그때부터 셰퍼드는 자기 세상을 만난 듯 물속에 서 ‘첨벙첨벙’ 능수능란하게 유영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잠시 후 물 밖으로 나와 흠씬 젖은 몸을 탈탈 털고 둑에 올라앉는다. 아직 젖어있는 털을 햇살에 말리며 참으로 편안한 눈으로 나와 아버지를 무심히 바라보곤 했다.
“미야, 우리도 수영할까?”
바닥끝을 헤아릴 수 없는 검푸른 물빛의 저수지가 무서웠지만 아버지와 함께라면 조금도 두렵지도 않았다. 한낮의 땡볕도 어쩌지 못할 만큼 물은 차가웠다. 아버지께서는 “미야, 아버지 목을 꽉 잡아”하시고는 나를 등에 태우고 넓디넓은 저수지를 가로지르며 헤엄쳐 나가셨다. 겁이 많은 나였지만 아버지 너른 등 위에서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살살 간지럽히는 물살의 느낌이 한없이 편안했다.
아버지는 술 한 잔 거나하게 드신 날이면 집 밖에서부터 큰 소리로 우리 형제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들어오셨다. 곤하게 자다가도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면 모두가 벌떡 일어났다. 기분 좋게 취하신 날은 어린 우리를 앉혀놓고 용돈을 나누어 주시기도 하시니까 술 드신 날의 아버지가 오히려 좋았다.
기분 좋게 취하신 아버지께서는 “미야, 니는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에서 태어났다. 알겠나!”하시며 내게 강조하셨다. 자주 들어온 이야기라 귀에 못이라고 박힐 지경이다. 내가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에 태어났다는 것이 아버지에게는 삶의 어느 한 부분 방점을 찍어두려는 기억의 확인일지도 모를 일이다.
군인이셨던 아버지께서는 내가 태어난 그 무렵에 연천에서 근무하셨다. 연천 땅은 아버지께서 많은 애정을 갖고 계셨지만 홀로 고향을 지키셨던 할머니의 성화에 내가 세 살이었을 무렵 우리 가족은 몇 대에 걸쳐 뿌리를 내린 아버지의 고향 거제도로 내려왔다. 안개처럼 희미한 기억뿐이지만,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이라는 출생지만큼은 가슴속에 찍어 놓은 도장처럼 잊히지 않았다.
거제도집 바로 앞에 있는 하천은 우리의 놀이터이자 작은 생태 학교였다. 작은 돌멩이와 온갖 풀들을 모아 소꿉놀이도 하고, 물속 돌멩이를 들춰보며 가재와 민물 고둥 같은 것들을 갖고 놀았다. 한여름의 긴 낮에도 얼마나 짧게 느껴지던지 호기심만 가득했던 유년 시절이었다. 자연의 품속에서 내 몸과 마음은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물려 입은 언니의 옷이 점점 작아지면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은 조금씩 작아지고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가족이 거제도로 이사를 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할머니께서 훌훌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연천을 떠나고 싶지 않으셨던 아버지를 안달복달해서 거제도로 내려오게 한 것은 할머니께서 어떤 예감이라도 있었던 걸까. 나는 할머니의 죽음을 보면서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 하늘나라로 간 가족들은 그곳에서도 서로 만나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을까? 바람이 불어왔다 그치면 그 바람은 어디로 가서 어디에 머물러있는 것일까? 답도 없는 물음에 빠져 고민하는 꼬마 철학자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계절은 쉼 없이 바뀌고 있었다.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지만, 더위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한낮의 무더위에 지친 언니들과 나는 저녁 때 집 근처 저수지로 수영하러 갔다. 물속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닥끝을 알 수 없는 짙은 물색. 한두 번 자맥질에 누군가가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눈앞에서 본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함에 얼른 물 밖으로 나왔다. 곁에는 언니들이 있었지만 나 혼자인 것처럼 무서웠고, 방망이질하듯 두근거리는 가슴은 한참이 지나도록 진정이 되지 않았다. 만약 아버지가 내 옆에 계셨다면, 그것만으로도 물속의 어둠은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나보다 더 나를 아껴주셨던 당신. 때때로 저수지 물 위쪽에 내려앉아 부유하는 낙엽처럼 방황하는 나를 붙잡아 주신 아버지. 무시로 마음에 바람이 불어와 흔들린다고 하더라도 조금만 아파하고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기다려 주신 아버지. 이제는 굵고 강인했던 아버지의 목에 매달리고 싶어도 더 이상 매달릴 수 없다. 아버지와 함께였던 간지러운 물살의 느낌을 잊지 못하고, 따듯했던 당신의 등을 그리워 할 뿐이다. 어렸을 적 느꼈던 아버지의 편안한 등과 저수지에서의 기분 좋은 물살의 느낌을 아직도 나는 잊지 못한다, 심장 가장 깊은 곳에 가장 든든한 끈으로 나를 붙들어 주신 아버지. 어떤 쇠사슬보다 더 단단한 아버지라는 이름의 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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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소감>
추영미
불볕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게 하는 벅찬 소식이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변함없이 반복되는 생활에 나도 모르게 지쳐갔다. 양팔로 감싸 안고, 그것도 모자라 행여 놓쳐버릴까 깍지 낀 손을 풀고 보니 나 혼자 덩그러니 남은듯했다. 나를 돌아보지 못한 시간의 결과는 허전함과 허무함이었다.
나는 누구일까? 나란 사람은 도대체 뭘 해야 하나? 신열을 앓듯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길을 찾아 헤매고 문을 두드리니 ‘눌산문예창작교실’의 길이 열리고 문이 열렸다. 십대시절 꿈꾸던 문학에의 로망을 안고 한 발짝 조심스레 내디뎠다. 그러나 나를 찾아 떠난 여행은 한걸음 한걸음을 뗄 때마다 무지한 자아와의 회우였다. 다시 걸음마부터 배우는 아이가 되었다.
넘어지겠다 싶으면 먼저 손 내밀어 주시고, 주저앉아 있으면 일어나라 격려해주신 눌산교수님과 고혜량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지면 할애를 해주신 ‘문장21’에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먼저 앞서 걸어가신 선배 문우님들의 맑고 고아한 발자국을 조심스레 따라 갈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외로움을 피해 글 앞에 섰을 때 고독과 고통이 더 배가 되었으나 이제는 글 쓰는 사람만이 누리는 지복임을 깨닫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살아온 날들의 기억들을 쓰고 쓰다보면 미래는 눈앞에서 늘 현재로 살아 꿈틀거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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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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