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원영:시인,낭송가,시조창가/2010년시사문단시등단/2020년현대시조등단/거제문협.청마기념사업회이사.거제시조협사무국장/능곡시조교실수강/2020.거제개발공사 전국스토리텔링공모우수상
「금요거제시조選-183」
가을은
허원영
제 세상 만난 단풍
갈수록 붉어지고
티 없이 높은 하늘
곡예 하는 잠자리들
가을은
풍요의 계절
가지 끝이 야물다.
凋落의 시작이라
귀뚜리 구슬프고
스치는 바람에도
심장이 베인 듯이
가을은
애상의 계절
은하수 빛 푸르다.
왜 그리 바빴던가
번잡했던 여름 한 철
그립고 살가웠던
정마저 멀리하고
가을은
사색의 계절
오솔길을 걷는다.
◎ 직분
가는 여름이 아쉬운지 매미 소리가 그악스럽다. 쉬임없이 울어 재키는 것이 매미의 직분이지 싶다.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 1894~1960) 박사의 자서전 <나의 回顧錄>에 「木川 崔巡査」이야기가 나온다.
「여보! 여보, 아 여보!」
「나 말이요?」
「그래, 당신 이리 좀 와」
「왜 그러시는고?」
「뭐야! 이리 오라면 이리 와」
검은 고무신에 때 묻은 한복차림의 중년 남자를 노려보는 순사는 흔들거리는 흰칼을 허벅다리에 눌러 붙이고 헐떡거리며 큰 소리로 대들었다.
「당신 이름이 뭐야?」
「나 조병옥이올시다」
「뭐 조 병오기?」
「당신 왜 創氏改名 안 했소」
어이없이 바라보고 있던 중년 남자도 나지막이 물었다.「조선 사람이 뮛 때문에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성명까지 바꿔야 하겠소. 보아하니 당신도 조선 사람이구만, 이름은 바꿨을 테니 물을 필요 없고, 그래 조상도 바꿨소?」 「뭐라고? 당신 같은 不逞鮮人(불평불만을 품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조선 사람)은 맛을 좀 봐야 해, 주재소로 가.」 멱살을 움켜잡고 금방이라도 후려 팰 것같이 덤벼드는 순사를 간신히 떠밀고 등 뒤에서 퍼붓는 입에 못 담을 욕을 들으며 조상 묘소의 제실 한 칸 방을 얻어 놓은 집으로 돌아갔다.
維石 趙炳玉 박사가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못살게 구는 일본 형사들이 귀찮아서 고향인 용두리로 소개 생활을 떠나 지내던 중 木川支署 앞에서 불심검문을 당하던 때의 이야기다. 「그 최순사는 내가 경무부장으로 있을 때까지 순경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경무부 인사과장에게 특명을 내려 경위로 승진시키는 동시에 木川支署 主任으로 보직 발령을 내렸던 것이다.」 집을 짓는 데 있어 설계사는 집 전체를 보아야 하지만 도장공은 벽만 살피면 되고 방 놓는 사람은 구들장만 보아도 되나니, 최순사는 직무에만은 더없이 충실했던 셈이다. 그런 최순사가 경위로 특진하여 지서 주임이 되었으니 德人의 고마움에 보답하느라고 더욱 직무에 충실했었지 싶다.
維石 趙炳玉박사는 조윤형 전의원, 미스터 쓴소리 조순형 전의원의 부친이시다. 아호 維石은 大學의 절피남산 유석암암 (節彼南山 維石巖巖)에서 취했다. 즉 깍아 지른 저 남산 돌과 바위가 줄지어 있구나, 윗자리에 있는 사람은 남들이 우러러보니 항시 조신하고 볼 일이다. 라는 경구이다.
<20년 후의 약속>은 오 헨리의 작품으로 우정과 직무에 관한 경찰관의 이야기다. 오 헨리는 그 유명한 <마지막 잎새 (The Last Leaf)>의 작가이기도 하다. 보브와 지미•웰스는 20년 후에 만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서부로 간 보브는 다이아몬드 넥타이핀을 가질 정도로 성공하여 돌아왔는데 지미•웰스는 뉴우요오크 시의 경찰이었고 순찰 도중 약속 장소에 가서 보브를 만났다. 그러나 자기가 지미라는 말을 하지 않고 돌아와 버린다. 얼마 후 지미의 동료는 다음과 같은 메모를 들고 보브를 찾아간다. 「잊을 수 없는 보브! 나는 20년 전에 약속한 시간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그 장소로 갔었네. 그때 나는 자네에게 시카고 경찰에서 체포령이 내렸다는 것을 알았네. 무척 자네의 신변을 염려했지. 그러나 어린 시절의 우정이었는지는 몰라도 차마 내 손으로 체포할 수 없었네. 할 수 없이 돌아와서 동료 형사에게 부탁하여 나의 임무를 끝마치려 하네.」 보브는 서부의 무법자였고 그와의 약속 장소는 지미의 순찰 구역이었다.
풍파에 놀란 사공(沙工)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웨라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를 하리라.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린 장만(張晩, 1566-1629)의 작품이다. 풍파와 구절양장은 벼슬살이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벼슬을 단념하고 농사를 짓겠다는 다짐, 농사가 본분임을 늦게사 깨달았지 싶다. 죄 없는 백성을 치고 패던 조선의 衙前, 못살게 굴었기에 일제 때 순사가 온다고 하면 호랑이보다 무서웠기에 우는 아이도 울음을 멈추었단다. 직분(職分)은 직무상의 본분이다. 세상이 바뀐 지금, 木川 崔 巡査만큼의 사명감을 지닌 자랑스런 민주 경찰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악스레 우는 게 직분인 매미, 그 매미의 열정이 부럽기만 하다. <이후 다음주에 계속>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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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발발행인 능곡이성보 |
가을을 두고 성숙이니, 조락이니, 잉태니 하며 그 감상이 각각이다. 오곡백과가 여물고, 낙엽이 지고, 잎 진 자리에 새로운 싹 눈이 자리 잡는 것은 영고성쇠가 이어지는 자연현상의 과정일 뿐인데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인식으로 가을을 생각한다. 근심 수(愁)는 ‘가을의 마음’이라는 회의자(會意字)로 이루어져 있어서 가을을 애상을 유발하는 계절이라 하던가. 늦여름이라 초가을날 함께 별바라기를 하며 한잔 술 나눌 친구가 없음에 고적을 느끼며 벌렁 누워 하늘을 본다. 이런저런 인연을 떠올리다 잡념을 떨치려 머리를 도리질해 본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시간에 약 2.000가지의 생각들이 머릿속을 드나든다고 한다. 하루 24시간 동안 명멸하는 생각들은 무려 사만팔천 가지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오만가지 생각’이지 싶다. 단풍은 제대로 붉어야 제맛이 난다. 그래서 十月霜葉紅於五月花 (시월 서리맞은 단풍잎이 오월의 꽃보다 아름답다.)라 했다. 가을은 단풍의 세상이다. / 제 세상 만난 단풍 갈수록 붉어지고 / 있다. 그런가 하면 티 없이 맑은 가을 하늘은 높기만 한데 군무가 한창인 고추잠자리, 혼자 보기가 아깝기만 하다. 과목의 가지 끝엔 야물은 과일이 매달렸기에 / 가지 끝이 야물다 / 는 표현이 사실감을 더해주고 있다. 그래서 첫수의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 되었다.
凋落은 초목의 잎 따위가 시들어 떨어짐을 말한다. 때맞추어 귀뚜리가 운다. 어찌 서글프지 않으리오. 그기다 갈바람까지. 비감은 심장이 베인듯하다. 거기다 은하수의 빛마저 푸르기만 하다. 그래서 둘째 수의 가을은 “애상의 계절”이 되었다. 거기에 기러기까지 울어예면 애상은 절정을 이루리라. 어느 사이에 ‘이별의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 아아 아아 /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
시인은 마당발이다. 그래서 여름 한 철 바쁠 수밖에. 그랬었는데 가을이 되자 / 그립고 살가웠던 정마저 멀리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오솔길을 걷고 있단다. 그 오솔길은 사색의 길일지니, 그래서 셋째 수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 되었다. / 가을은 풍요의 계절 가지 끝이 야물다./ /가을은 애상의 계절 은하수 빛 푸르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 오솔길을 걷는다./ 3수 연작의 종장 처리가 품격을 더하였기 격조 있는 작품이 되었다.
詩聖 두보(杜甫)는 명시<등고(登高)>에서
萬里悲秋常作客(만리비추상작객)
百年多病獨登臺(백년다병독등대)
타향만리 서글픈 가을날에 항상 나그네 되어
평생 병 많은 몸 홀로 누대에 오르네.
시성 두보이련만 곤고(困苦)한 그의 삶이 절절히 묘사되어 슬픈 감회에 젖는 것도 가을의 애상 때문이리라. 하지만 시인의 <가을에>란 작품을 감상하면서 ‘풍요’와 ‘애상’과 ‘사색’을 함께 느끼게 되었으니 어찌 흔연치 않으리오. 오늘 밤 귀뚜리 울음소리는 덜 처량할 것 같다. -능곡 시조 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