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금요거제시조選-134」이덕재 '추 분 무 렵'

기사승인 2022.10.07  12:57:44

공유
default_news_ad2

- ▲이덕재/거제 동부 출생 거제 동부면 구천마을 이장 2017 현대시조 등단 한국문협 회원 거제시조문학회 회장 능곡시조교실 수강 시조집 '개똥벌레’

「금요거제시조選 - 134」

추 분  무 렵

 

 

 

 


                          

 

이  덕  재


      1. 
        밭으로 가는 길섶 잡초 속의 코스모스
        모질게 버티면서 일궈 낸 생명의 혼
        바람도 억새풀꽃도 함께 응원합니다.

     2.
        억지로 되는 일은 없다시던 어머니가
        노치원 가시면서 느릿하게 하신 말씀
        ‘아범아, 하늘이 맑다. 쉬엄쉬엄 하거라.’

◎ 사람을 알아주는 일(4)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기의 인물은 누구일까. 이 물음에 대하여 타임지는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을 꼽았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계 물리학자이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론물리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브라운 운동과 광전효과를 증명하고 양자역학을 발전시켰으며, 상대성이론을 창시해 현대물리학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가 이룬 놀라운 업적과 독보적인 창의성은 그 이름이 천재와 동의어가 되는 결과를 만들었다. 그의 헤어스타일, 표정, 얼굴 주름, 패션, 눈빛 등 개인의 이미지들 또한 천재의 상징과도 같아졌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나치독일의 횡포와 만행에 신물을 느끼고 미국으로 망명 간 1932년 10월의 사건을 기억한다. 그 당시 미국의 언론은 ‘세계과학의 바티칸 궁전이 미국으로 오다’라는 대서특필한 기사가 한 달간 이어졌다. 미국은 아인슈타인에게 최대의 대우를 해주었고 사후에는 아인슈타인이 쓰던 볼펜∙원고지∙책상까지 국보로 지정하였으며, 그가 근무하던 프린스턴고등연구소로 통하는 길을 ‘아인슈타인 드라이브’라고 명명했다.

이탈리아출신의 물리학자 페르미(Enrico Fermi, 1901~1954)는 핵 시대의 주요 개척자 중 한 사람이었다. 1934년 페르미는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소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페르미는 193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페르미가 무솔리니 정권하에 있던 이탈리아를 피해 1938년 노벨상을 수상하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한 사건도 아인슈타인의 망명과 비견할 사건이었다. 페르미는 컬럼비아 대학의 물리학과 교수로 3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다 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핵폭탄 개발에 착수했다. 그리고 마침내 핵 연쇄반응을 처음으로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시민권을 획득한 페르미는 시카고대학의 교수로 지내며 핵입자에 관한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다. 

1953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방사성원소를 그의 이름을 기려 페르뮴(Fermium)이라 붙였다. 
 페르미가 죽자 그가 근무하던 시카고대학 근처에 페르미랩(Fermi Lab)이라는 세계 최대의 입자실험소(粒子實驗所)를 지었고 페르미 날을 정하여 일 년에 한 번씩 추모제를 지내주고 있으며, 미국 핵에너지위원회(AEC)는 우수한 물리학 업적을 이룬 학자들에게 매년 페르미상을 수여하고 있다. 바로 단군 이래 최고의 천재라는 이휘소(李輝昭, 1935~1977)박사께서 1974년부터 1977년 서거하실 때까지 책임자로 근무하신 곳이 페르미랩이다.

실제로 만약 아인슈타인이나 페르미가 자기의 조국에서 계속 과학 활동을 했고 정부에서도 그들을 적절히 이용했다면 세계 2차대전의 결과가 어떠했을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과학계의 지배적인 견해인 것이다.

     따개빈 양 엉겨 붙은 기계독 부스럼을
     마이신 알약 빻아 환부마다 발라주던
     외갓집 사랑채 골방 혼자 피난 왔던 사람.

     준수한 생김새에 책을 늘 끼고 살아
     큰 인물 되리라고 외할머닌 예견했다
     삭이지 못한 아픔을 술로 달랜 긴긴 세월.

     한 이십 년 전일 게다 수유리 통술집에 
     입성은 초라해도 눈빛은 살아 있어
     어떻게 사느냐는 말 차마 하지 못했다. 
                         - 拙詩, ‘상흔-성문이 아재’, 전문

(성문이 아재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린다. 때를 만나지 못한 불우한 사람이었다. 나는 진작 그를 알아보았건만 세상은 그를 외면했다. 오호통재라.)

‘사람을 알아주는 일’이라 題하여 한신, 이승기, 첸쉐썬, 아인슈타인, 페르미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과학자 한 사람의 홀대 결과가 당사자의 좌절로 끝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나 이승기 박사처럼 행여 인류의 재앙으로 남는 것은 아닌지 모골이 송연하다.  
 우리 주변에서도 인물을 몰라보고 홀대하는 일은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그래서일까. 인간학의 보고로 평가받는 ‘史記’를 쓴 사마천 선생은 ‘史記’ 후기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사위지기자사 모위열기자용(士爲知己者死 母女爲悅己者容)(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하여 얼굴을 다듬는다.)   
                                (이후 다음 주에 계속)

능곡이성보계간현대시조발행인

《감상》
시조 작품 〈추분 무렵〉은 같은 제목으로 2편의 단수를 읊은 이덕재 시인의 작품이다. 쉽게 읽혀지는 詩, 시인은 詩作의 묘미를 얼추 터득했지 싶다. 
1편에서는 길섶 잡초속의 코스모스의 애잔하고도 강인한 생명력을, 2편에서는 9순의 어머니가 육순의 아들에게 보내는 다함없는 당부를 그렸다.

지난날 이맘때쯤이면 /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 향기로운 가을길을 걸어갑니다/. 라는 가수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을 흥얼거렸다.
나도 40대 초반에 ‘코스모스’라 題하여 / 꽃이 피기 전엔 거들떠보는 이 없었다// 키대로 뒤집어쓴 흙탕물의 세레나데// 가을에 피는 꽃은 왜 슬퍼야만 하는가./ 하고 2수 연작에 첫수를 읊었다. ‘가을에 피는 꽃은 왜 슬퍼야만 하는가’하는 종장에 꽤 뜸을 들였지 싶다.

한 열흘 하늘바라기로 봄부터 가을까지 공을 들인 코스모스다. 그래서일까. 바람도 억새풀꽃도 함께 응원한단다. 그 응원에 답이라도 하는 양 바람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농사꾼 시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소재가 넘친다. 들녘은 시인의 소재의 보물창고다.

2편에서 눈길을 끄는 말은 ‘노치원’이다. 노치원은 조금은 생소하나 다양하게 쓰이는 모양이다. 아직은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으나 머잖아 등재될 모양이다.
 노치원은 ‘노인주간보호센터’가 정식 명칭이란다. 동방예의지국인지라 예의 바르게 표현한 것이 ‘어르신주간돌봄센터’란다. 정식 명칭은 문서상, 법적인 문제와 관련될 때 사용하는 것이고 일상적으로 그냥 ‘노치원’으로 부르고 있다. 노치원(老雉園), 왠지 서글픔이 감돌아 외면하고 싶어진다. 늙어서 어려지는 상태가 노치일지니 서글플 수밖에.
어릴 적 고향마을에 ‘조조영감’이란 별호를 가진 노인이 계셨다. 마을의 최고령 노인인데 연세가 70이었다. 당시 그 노인의 맨손체조는 화제였다. 의학의 발달로 평균 수명은 연장되었으나 정신건강은 그게 아닌 모양이다. 치매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하지 않던가. 머잖아 노치원이 유치원 마냥 일상으로 쓰이는 용어가 되리란다. 유감스럽게도. ‘아범아, 하늘이 맑다. 쉬엄쉬엄 하거라.’ 복 많은 시인이다. 어머님이 살아 계시니 말이다.
 ‘子欲養而親不待’, 모시고 싶은 부모가 계시지 않으니 나는 이를 설워한다.
                                     - 능곡시조교실 제공

거제타임라인 webmaster@gjtline.kr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ad4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ad43
ad44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