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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소리]'지역언론에 종사한다는 것'<2>

기사승인 2021.09.06  00:3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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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고등학교 후배인 거제시 공보과장 직무대리의 성추행사건을 보도한바 있었다. 가히 폭발적 반응이여서 이틀만에 기사문 조회수가 1만명을 넘었고 기사는 내려갔것만 지금은 1만 천명을 훨씬 넘겼다. 이 기사 문제로 당해자의 고통이 어떠할지는 불문가지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가정에 대한 경고음이어서 매우 안타까워 심장 한 쪽이 아려오는 기분이다. 개인적으론 정말 미안하다.

그러나 이런 기사를 후배라고 해서 어찌 구별해서 다르게 취급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결국 보도를 하게 됐다. 물론 제보자의 두눈동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는 점이다. 그러자 본인은 물론이고 다른 후배들 전화가 빗발 쳤다. 심야에도 술에 취한 후배들이 "선배가 후배를 그렇게 죽여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안타깝다.

오히려 글쓴 내가 죄인이 되는 세상. 이에 그칠세라 해당기사에는 댓글들이 달렸다. "늙은이 벌 받을 기다", "늙은이 오래 살것다" 아주 저주의 말을 듣는 것 같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하늘과 땅 같은 차이를 느낀다. 결국 그 말 속에는 "자기 자신은 얼마나 깨끗하게, 바르게 산다고 남을 비판하는 것이냐는 항변"이 깔려 있다. 이런 말들을 듣는 날은 하루 종일 속이 상한다. 그 여운의 파장은 길게 나를 괴롭힌다.

기사문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다양한 욕구를 제어하지 않기 위해 가능하면 댓글들에 대해서는 대응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그러면 그만큼의 크기로 나는 '마음의 병'을 얻는다. "기래기 같다"느니 "기사조차도 되지 않는 글을 쓴다"는 등의 노골적인 인신 공격에는 화도 나고 응분의 공격을 하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또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랜다. 

언론에 종사한다는 것이 결코 명예롭거나,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재정적으로도 여유롭지도 못하다. 돈되는 사업이 결코 아니다.  때로는 자긍심을 갖게 하거나, 보람을 찾는 일이 왜 없을까 마는 그것은 잠시일 뿐이고 인격성 모독을 당하는 상처는 더 깊고 오래토록 가슴 한쪽을 멍들게 한다. 특히 시정을 심하게 비판하거나 사회의 어두운면을 기사화 할 때는 더 더욱 심한 반감을 받는다. 그래서 항상 법의 잣대를 의식하면서 기사를 쓰게 마련이다. 

후배들이 존경하지 못하는 선배, 시민들이 기레기로 싸구려 취급을 하는 기자. 과연 그렇게 인격을 매도 당해도 되는 것일까? 자신들은 그래도 이무렇지 않고 언론 본래의 사명, 저널리즘의 본질을 가능한 범위에서 찾아가려는 사람은 비난 받아야 하는 사회가 과연 정의로운가? 그래도 다수의 시민들은 그렇지 않고 정의롭다고도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믿음과 착각 속에 흰 머리가락 숫자만큼이나 아려오는 슬픔을 위안이란 이름으로 염색을 한다. 그러나 그게 영원할 수 있는가? 하는 반문은 언제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공적인 시민들의 세금으로 조성된 예산을 마치 제 쌈지돈인양 관행이란 허울좋은 가림막을 내세우며 쓰고 있는 공무원들을 볼 때는 울분을 토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이 이땅의 진실을 가로막는 악의 원천이 되고, 그것이 시민들의 눈과 귀를 막는 저널리즘적 선동정치의 단초라는 점을 느낄 때, 나는 화를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슬프게하거나, 화나게하는 일들을 그들은 '공무'나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가식의 가면을 쓴다. 그리고 권력의 달콤한 맛에 빠져 기회를 이용한 자기 사익 추구나, 자리 보전을 위한 보검으로 사용한다. 마치 제돈으로 시혜하듯이 뻔뻔스레 공무를 집행하면서 차기를 도모한다. 겨우 싸인하나, 도장하나 찍는 수고로움 뿐이면서도 이면에 잠겨있는 정치적 도의적 책임마져도 도외시하는 그들의 전횡을 우리는 이제는 과감히 파격해 가야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공공성의 투명함이 어느 때 보다 강해진 시대임에도 가림막 속에서 태연히 자행된다.


많이 터지고 맞을 수록 면역력, 저항력도 강해지듯이 아픈 순간은 짧지만 결코 정의로움은 소수의 몇몇 편견에 가려지지 않을 것이다. 나이 일흔을 넘으니 이제 세상 보는 눈도 달라졌다.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무엇이 제일 소중하고, 무엇이 제일 정의로운 것인지를 어렴푸시나마 눈뜨는 것 같아서 '그래도 삶은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걸 깨닳는다. 

      [삐딱소리]'지역언론에 종사한다는 것'<1>
        거제타임즈 창사 8주년을 맞은 심중소회(心中所懷)
        박춘광  |  geojetimes@hanmail.net
        승인 2011.05.12  18:21:18  |  조회수 : 1529

 오늘 아침 한 여자로 부터 받은 '똥세례를 안기고 말겠다'는 폭언성 첫 전화로 하루를 시작한 탓인지 종일 마음이 무겁고 개운치 못하고 언잖다. 그 여자의 전화 내용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역언론에 종사한다는 것이 결코 화려하지도, 재물을 모아 가족들로 부터 가장노릇을 제대로 한다는 평가도 받지 못하는 존재이건만 '저널리즘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에 괜히 죄인인냥 남 앞에 나서기가 주저스럽다.

며칠 전에는 이 여인의 남편되는 사람의 폭언이 있었기에 더 그렇다. "검찰청 앞이다. 고발할 것이다. 돈이 얼마가 들어가더라도 결코 그만 두지 않겠다"는 거의 협박성에 가까운 말 때문이기도 하다. 정말 내가 그렇게 못할 기사를 쓰는 기자일까?  나의 그림자를 다시금 되돌아 본다.

최근들어 이런 전화를 자주 접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실리면 그 사실에 대한 진실된 해명이나 기자도 신이 아니니까 반론요구를 하면 좋으련만 그 보다는 오히려 협박성에 가까운 폭언으로 전화질을 한다. 얼굴을 보지않고 하는 전화라는 방패막이 있기 때문인거 같다.  물론 그런다고 내가 크게 달라 질 것은 없지만 그저 우울하고 마음이 불편하다. 그 사람이 주장하는 내용이 절대로 내가 동의하거나 받아들 일 수 없는 사실에 기초했지만 어쩐지 내가 못할 짓을 한 죄인인듯 하다.

"전임 시장 최측근 인사의 거제시도시계획 변경사건과 관련한 항변' 이어서 가능한 인간적으로 이해를 하면서 노여움을 달래고 싶지만 그들과 '저널리즘의 본질이 어떻고, 도덕적으로 크게 흠결이 있는 존재는 윤리적 약자로 설땅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등의 대화를 나눌 상황이 아니라서 "하고픈 뜻대로 하라'는 대답으로 결론 지어야만 하는 탓에 안타까움이 더 하다.

이렇게 궂은 일, 즐거운 일, 슬픈 일들 속에 거제에서 제일 처음 인터넷신문으로 출발한지가 벌써 만 8년이 지났다. 그러면서도 항상 머릿 속을 채우고 있는 생각이 '지역에서 언론매체를 운영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사실로, 마치 소화하지 못해 채한 음식물 처럼 속에다 안고 산다. 때론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사람과의 관계가 기사보도로 인해 소원해 지고, 그러한 일로 서로 등 돌리며 살아가야 할 때는 참으로 직업에 대한 회의도 많이 느낀다. 다 제나름의 판단이지만 지역에서 언론에 종사한다는 일이 정말 예사롭지 않다. 거제신문 사장을 시작으로 중앙신문 사장을 거쳐 지난 17년 세월 동안 남은 것은 마음의 상처, 잃어버린 재물, 흠집난 명예 뿐인데 이제 무엇이 남을까? 하고 가끔 내 육십성상을 반추해 보기도 한다.

신문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과 같다고 하듯이 지역신문의 수준은 거제시민의 수준과 비례한다. 따라서 앞으로 거제시민 수준이 높아지면 신문의 수준도 높아질 것이지만 저널리즘의 정도(正道)를 지키는 신문이 정말 얼마일 것이며, 그에 따라 시민 수준도 높아질 것이나 그에 희생해 온 사람들은 시민들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일부 재력가들이 점령한 신문, 정치적인 의도에 따라 기사를 남발하는 신문이 있다면 신문의 존재 가치는 떨어 질 것이다. 신문 기사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신문 존재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현실까지 초래하게되면 더 심각한 문제도 생긴다 그리고 종이신문과 일반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질적 차이가 별로 없다는 평가가 그리 과도하지 않은 세상이 됐지만 언론계 종사자들 조차 확고한 사명감이 없다면 희망은 없다.

그럼 우리는? 나는 어떤가? 고개를 흔든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하자는 각오를 하면서도 꼭 이런 불쾌한 전화질에 접하면 나 또한 보통 사람일 수 밖에 없는 감정을 속일 수 없다. 지역신문의 성패는 시장주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경쟁력 없는 상품의 소멸에 불과하겠지만, 민주주의 관점에선 중요한 여론매체의 소멸일 수도 있다. 신문은 분명히 다른 매체와 달리 심층적이고, 종합적인 여론 전달매체 기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제대로된 지역신문의 소멸은 사회적 손실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지역민들의 인식도 전환되어야 할 시점이다.

저널리즘의 본질은 기사의 객관성, 공정성, 정확성에 있다. 다시 말하면 철저하게 확인된 사실을 일반 시민을 위해 전달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정확하지 않고 특정 집단이나 특정 사상에 편향된 기사는 저널리즘의 본질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 신문기사는 권력자나 광고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위해,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것이 저널리즘의 본질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여건은 이를 채우지 못해 늘 2% 부족하다는 느낌으로 산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신문의 존재가치는 결국 신문이 본질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된다. "혁명의 불길과도 같은 뉴미디어의 변화 속에서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 기자 정신"임을 다시 생각하며 옷깃을 여미어야 겠다.

미국을 대표하는 양심지이자 '신문의 신문'으로 평가받는 뉴욕타임스도 인종주의 편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도 경영을 위해 인터넷으로만 보도한다. 결국 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다. 따라서 다 함께 사는 세상이기에 언론종사자의 고뇌는 깊다.

사법기관이 ‘법과 질서’의 눈으로 ‘사건’을 다룰 때, 기자는 ‘인간과 정의’의 눈으로 ‘사람’을 만난다. 거기서 기사를 길어 올려야 하기에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권력자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시민사회의 대표를 ‘자임’한 기자는 시민의 눈으로 권력의 부패와 전횡을 감시하고, 기사로 폭로하여 경종을 울리는 것이 사명이다. 

고급정보가 오가는 길목인 권력기관은 비밀스런 문서와 음험한 이야기들이 횡행해 기자들은 묻혀진 진실을 캐낸다는 의미로 언론의 존재이유를 망각하지 않고, 날 서린 비판의 눈으로 권력자들을 감시한다. 시민의 눈으로, 시민들의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권력을 향해 따져 묻는 탐사·기획·심층 보도는 원래 기자들의 몫이다. 그런 과정에 취재 보도된 것이 독봉산 웰빙공원의 도시계획도로건이고, 계룡중학교 뒷편 도시계획도로 취소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를 '돈으로 죽이겠다', '똥을 퍼부어 망신을 주겠다'는 폭언은 언어의 유희를 넘어 폭력이며 지역사회에 대한 도전이지만 이것이 보편화 되는 현실이 그저 씁쓸하다. <글/ 박춘광/본사 편집인>

 

박춘광 기자 gjtline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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