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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2] 12일부터 신말수 단편소설집 매주 연재

기사승인 2021.07.10  16:5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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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출신 여류소설가 신말수 작품 '황해여인숙' 서문-'작가의 말'

                               작가의 말

내게는 낡고 검은 색 여행 가방이 하나 있다. 한 사흘 치쯤의 일상을 담으면 금방 배가 불러오는 가방이다. 얼마나 오래 사용했는지 헤아려 보면 내 열 손가락으로는 어림없다. 바퀴의 외벽은 마모되었고 가방 겉옷은 탈색되어 추레한 꼴이 줄줄 흐른다. 누가 보아도 오랜 연륜만 자랑되는 구닥다리 가방이다. 이젠 저도 늙은티를 낸답시고 때와 장소도 가릴 줄 모르고 함부로 소리를 내지른다. 나이 들면 염치가 없어지는 건 사람이나 물건이나 다를 게 없나 보다. 어떤 때는 바퀴의 괴성이 민망해 사람들 기척 앞에서는 잠깐 멈추어서기도 한다. 남 눈치 보며 끌고 다녀야할 만큼 소리가 요란하다. 그랬어도 나는 이 가방 없이 한 발자국 길도 나서지 못한다. 사소한 여행지는 늘 함께 했다. 이 가방과 함께이면 모든 길들이 편안해 진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가방이다.
오래, 라는 말에는 어떤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불화를 견뎌낸 인내도,사랑의 중요한 순간들도 흔적으로 배어 있을 것이다. 문명이 아무리 제 발전을 뽐낸다한들 오래, 라는시간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여느 유명 백화점인들 진열할 수 있는 상품도 아니다. 오래, 라는 말은 많은 시간들의 켜만이 이루어 낼 수 있는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새것이란 말에 부담을 느끼고는 한다. 어렸을 적, 새 운동화를 사는 날이면 흙을 묻혀 털어내고 또 묻혀 털어내고, 밤새 그 짓을 반복했다. 그런 후면 운동화는 새것이 아니라 오래 신던 신발처럼 보였다. 그런 느낌의 신발은 마음이 편했다. 발칙하게도 어린 나이의 나는 오래된 시간을 조작해내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내 작은 가방도 오랜 시간과 공간을 동거했다. 그러면서 서로를 알아 나갔다. 알고 있다는 건 관계에 많이 유리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충분하게 읽어낼 줄 도 안다. 서로를 잘 아는 것만큼 편안한 사이가 어디 있을까. 가방과 나 사이는 그렇게 오래된 시간이 만들어 낸 관계이다. 고심하지 않아도 가방의 용량을 짐작할 수가 있고 옆 주머니에는 무엇을 넣어야 편리한지도 안다. 어떠한 방법으로 수납하면 하루
치쯤을 더 벌 수 있을까, 그것조차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가방 또한 내 마음을 척척 헤아린다. 이번에는 왜 길을 떠나는걸까, 어디에다 무엇을 버리기 위해서인지, 그것조차 먼저 짐작을 한다. 그래서 저를 어디로 끌고 다녀도 투정 할 염도 안 한다. 오래된 관계는 서로의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다. 또 대답 같은 게 필요하지 않다. 내 가방은 내 글 속에 자주 등장한다. 가방의 연기는 너무 능청 스러워서 웃고플 때가 많다. 바퀴 소리로 투덜거리면서 제 몫의 할 일에 게으름부리지 않는다. 가방이 내지르는 신경질적인 소리 조차 밉지가 않다. 이 눈치 저 눈치에 맘대로 뱉지 못한, 세상에 대한 나의 구시렁거림일지도, 그래서 엉큼하게 즐기고 있는 걸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읽는 걸 좋아했다. 마치 읽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시달리듯 문자만 보면 읽었다. 천재나 영재도 아니었건만 학교 문턱을 밟기도 전에 글자 빼곡한 소설을 즐겨 읽었다. 맨 처음 읽은 책은 부피도 만만찮은 『원효대사』였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왜 그렇게 재미나든지, 그러다가 초등 4학년 때 『죄와 벌』을 읽었다. 열여덟이 되던 해, 이 세상에는 더 읽을 게 없다는, 터무니없는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물론 엄살이었다. 그러나 내가 소설을 쓸 것이라, 마음 먹어본 적은 없었다. 문학이란 것에 붙잡혀 내 인생을 부림당하고 싶지 않았다. 더러는 어느 나날들, 문학이란 것이 함께 살자, 내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기
도 했지만 그것들에 휘둘리지 않으려 마음다짐으로 버티곤 했다.

신내림을 거역하지 못하는 강신무가 그랬을까, 나는 결국 늦은 나이에 신열의 시달림을 견뎌내지 못한 무당처럼 그것들에 붙잡히고 말았다. 적잖은 나이에 신내림 굿도 없이 말이다. 그렇게 어루꾐으로 시작한 문학이다. 바탕도 부실한 내가 그렇도록 늦게 물꼬를 텄으니 문학이란 게 별 볼일이나 있겠는가. 늘 떠밀려 시들먹하니 견뎌낸 세월만 있을 뿐이다. 이곳저곳에 게재 된 글들을 묶을 준비를 하면서 잠깐 고향을 다녀왔다. 물론 가방과 함께였다. 오랜만의 여행에 가방은 저 먼저 신이 났다. 드르륵, 가방 소리로 버스를 탔고 멀미나는 여객선도 없이 긴 다리를 건너 남녘의 섬을 만난다.

바닷물이 청량한 거제도가 내 고향이다. 나는 내가 만들어 놓은 과거 속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가기 위해 숙소에 가방을 풀어 놓는다. 내 유년은 시대의 흐름으로 어지럼증에 시달리곤 했다. 군함이 토해 낸 그 많은 피난민들, 전쟁이 남긴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갑자기 불어난 인구로 우린 면사무소 옆 공회당에서 셋방살이 수업을 했다. 어수선한 시절이 모두 내 유년으로 모여 들었다. 학교라는 모양도 갖추지 못한 곳에서 수업했고 우린 교장 선생님의 근황보다 면장님의 거동에 민감했다. 군수의 시찰에 더 바삐 움직였고 공부보다는 면서기들과 동네 살림 걱정이 앞섰다. 


그런 어느 날, 그 공회당으로 특별 손님이 찾아왔다. 가마니 자루를 펴서 깔아놓은 음악회 손님이었다. 연미복 대신 의사처럼 하얀 가운 차림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들어섰다. ‘금발의 제니’였을 게다. 그날 나는 내가 깔고 앉은 가마니 자루가 짙은 갈색을 띄워내
도록 눈물을 흘렸던 건. 바이올린 선율이 봄날의 꽃잎처럼 하늘거리기 시작했다. 젖은
눈으로 창을 힐끔거렸을 때 마침 내 눈물을 훔쳐볼 셈인지 여름날 뭉게구름들이 유유히 하늘을 거닐고 있었다. 그 눈물은 구름들의 소행이었다고 변명하곤 한다. 바이올리니스트를 만난 공회당은 내가 만난 최초의 음악회였다. 공회당 마당, 벚나무 아래에 한데우물이 있었다. 나는 자주 우물을 들여다보곤 했다. 벚나무 가지 하나를 거느린 우물 속에는 늘 눈물이 많은 계집아이의 얼굴이 빠져 있었다. 가엾고 가여운 그 아이가 궁금해 나는 자주 우물을 찾고는 했다. 스산하면서 다정했고 아름다우면서 슬프기도 한 내 유년이었다. 비정한 세월의 생리는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결코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내가 앓아내고, 또 행복해 했던 내 유년의 모든 것은 그곳에 있었다. 변하지 않고 더 이상 자라지 않고 그때의 시간과 모양 그대로였다.

면사무소 옆에는 한 여자아이가 제 슬픈 얼굴을 들여다보던 우물이 있었고, 가마니 자루 바닥에 뚝뚝 흘려 둔 눈물의 흔적도 아직 마르지 않은 채였다. 그것들은 내 영혼의 눈 속에서 오롯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달음박질만 잘 하는 시간들이 모든 존재에
횡포를 부렸어도 내 마음 속엣것까지 위해할 수는 없었다. 내 글의 모든 밑그림은 이런 유년에서 비롯한 것이다. 유년의 모든 증거가 모여 있는 현장을 낡고 낡은 가방과 함께 다녀온 고향이었다. 그렇게 가방은 내 삶의 일부를 증인처럼 함께 했다. 때로는 삶의 무게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버거울 때도 버릇처럼 버스 정류장을 찾곤 했다. 함께한 가방은 이렇게 내 걸음을 위해 제 한 평생을 소진했다.
 
언제나 내 글을 아껴주시는 민충환 교수님께서 발문과 어휘풀이를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번 책을 통해 내 문학을 지지하고 신뢰해 주신 고마움을 반나마 갚는 셈이라 생각하니 내 마음의 부채가 좀 가벼워진 듯하다. 원근에서 말없이 응원해 주신 많은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끝으로,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요모조모 신경써서 책을 만
들어주신 강정규 선생님 그리고 표지화를 그려주신 이동진 화백님께도 큰 절을 올립니다.
                                  오월 아침에      신 말 수

 

 

박춘광 기자 gjtline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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