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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거제시조選-51]이덕재-'가마터 생각'

기사승인 2021.03.05  21: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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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재:거제동부출생/2017'현대시조'등단/거제문협,한국문협회원/거제시조문학회장/능곡시조교실수강/시조집'개똥벌레’

[금요거제시조-51]
   '가마터 생각'  

 

 




 

 


      이     재   
6년근 도라지의 깊은 뿌리 캘 때마다
나오는 사기 조각 모양도 다양하다
긴 뿌리 붙안고 나와 세상구경 하려는지.

오백 년 구천동목장* 가마터가 분명한데
어설픈 눈썰미론 실마리 풀지 못해
온 사방 나대어 봐도 도통 알 길 없어라.

하루에도 수십 개씩 마주치는 사금파리
그 사연 듣고파서 귀 기울여 보았지만
빈 가슴 채우고 마는 산등성의 바람소리
.

*구천동목장 : 조선시대 말 공급을 위해 나라에서 운영한 마목장. 거제시 동부면 구천리일원.

◎ 화답시
 
봄바람을 일러 惠風이라 말한 이는 書聖이라 칭함을 받는 왕희지가 난정서(蘭亭序)에서 한 말이다. 이 혜풍에 화답하듯이 산야에 봄기운이 약여(躍如)하다.
 다른 사람이 지은 시에 대답 하는 시를 화답시라 일컫는다.
 박목월의 시 ‘나그네’는 조지훈이 보낸 ‘완화삼’이란 시에 화답한 시이다.
 무애와 노산의 화답시를 살펴본다.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선생과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선생은 동갑(1903년생)이었다. 일본 유학시절 무애는 학자금이 궁하여 노산의 하숙집에서 밥 한상을 둘이서 갈라 먹기도 하는 등 몇 달간 신세를 졌다. 이런 연으로 평생 친교를 유지한 사이였다.
  노산이라는 호(號)도 무애의 작품이다. 처음엔 춘원(春園)이 지어주었다는 ‘이공(耳公)’ 이었다. 유난히 두텁고 쭈글쭈글한 귀였기에 야유적이라 하여 쓰지 말라고 하고는 고향 뒷산 노비산(鷺飛山)에 쫓아 「鷺山」으로 지었다고 한다.
 무애선생의 암기나 기억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는데 노산선생의 기억력은 워낙 널리 알려졌던 모양으로 정비석의 회고록 〈40년대 「문장」지 주변〉에도 나온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홍원(洪原)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일이다.
 누군가의 차입물 포장지에 조기 한 두릅 50전, 북어 한 쾌 30전, 광목 10자 20전 등 장보기의 품목과 수량과 가격이 30여 종 적혀 있었다. 선생더러 외어 보라고 하자 한번 훑어보더니 내용은 물론 순서와 가격까지 어김없이 외더란다. 일본인 간수 가 이 말을 듣고 내용을 임의로 고쳤어도 일호의 차착이 없이 외어 내었다. 이때부터 간수의 노산선생께 대한 언행이 정중 공손 해 졌다고 한다.
 무애가 신라 향가를 해독한 《고가연구(古歌硏究)》에 이어 1948년 고려 가요를 주해한 《여요전주(麗謠箋注)》를 발간했을 때 노산이〱채약송〉 3수를 지어 무애의 학적 노고를 치하했다.

             採藥頌
                        - 无涯형에게

    지난날 설악산에서 심멧군을 만났습네다
    십 년 동안 예닐곱 뿌리 캐었다던가
    선약도 선약이려니와, 정성이 그처럼 무섭더군.

    어허, 벌써 스무 해로고,  머리엔 백발을 썼을 거여
    이 골짝, 저 골짝 뒤져 몇 뿌리나 더 캐었는지
    일생을 산으로 다니며 삼 캐는 이도 있소구려.

    한뎃잠 얼마더며, 배고픈 적은 몇 번이런고
    아무리 그런들사 그 공덕 어디 알더라고
    말 마오 저 밖에 모르는 공덕이 더 큰 공덕입네다.

 이로부터 10년 뒤인 1958년 〈노산시조선〉을 낼 때 무애가 제사 5수를 지어 〈채약송〉에 화답했다.

           題詞五首
                      - 鷺山時調選에 부침

    동도(東都) 찬 여사(旅舍)에 한 이불 밑 잠들었고
    세 끼니 밥 한 상을 둘이 갈라 먹었도다
    지금에 어느 우정이 이만하다 할소냐.

    동갑, 그대와 나와 뉘야 더욱 ‘재주’런고?
    한 걸음 앞섰다고 노상 위라 뽐내다가,
    ‘요요요’ 구름 부른날 ‘내못미치다’ 하니라.

    「時調」란 무엇이니? 멋진 흐뭇한 「가락」-
    想과 말이 다 좋아도 요는 「토」에 달렸느니,
    멀고도 가까운 「소식」 그대 어이 아느니.

    六堂의 박달나무 담원(薝園)의 ‘인절미 떡’
    ‘난초’가 가람인가 ‘봄구름’ ‘무명옷’ ‘암고란(巖皐蘭)’은 누구누구?
    갖은 體다 벌이는 노산은 ‘물결이’라 하리라.

    젊어 각기 들메 메고 산으로 바다로 떠났것다
    내사 산삼 캐려다가 도랒 몇 뿌리 얻었네 마는
    어디 봐, 자네 광우리엔 구슬 몇낱 빛나는가.

 훌륭한 시조가 되고 안 되고는 첫째로 가락과, 둘째로 조사(助詞)를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놀라운 무애 선생의 탁견이다. 그렇다 시조의 멋이란 그 흥청거리는 가락과 함께 강박하게 매듭짓는 조사의 묘미에 있는 것이거늘.

 친구도 친구 나름 아니던가. 이렇게 시를 주고받는 친구는 진정 흔치 않으리라.
 무애와 노산, 그 친교가 부럽기만 하다
(이후 다음주에 계속)

감상)

능곡 이성보/현대시조 발행인

시조 작품 〈가마터 생각〉은 농사꾼 이덕재 시인이 남새밭에서 마주치는 사금파리의 내력을 찾는 3수 연작의 서정시조다.

감상에 앞서 시인의 시작노트를 옮겨 본다.

“겨우내 도라지를 캤다. 옮긴지 3년이 되고 보니 뿌리가 썩은 게 꽤 많았다. 깊이 파고든 뿌리 캐기에 힘이 부쳤으나 가끔씩 나오는 사금파리 보는 재미에 빠져 괭이질을 했다. 19세기 초까지 ‘구천동 목장’이었던 곳이라 모르긴 하나 자급하던 가마터임이 분명한데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남새밭의 경사로나 사기조각의 다양한 모양을 보면 꽤 오랜 기간 그릇을 구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을 뒤지고 알만한 이들에게 발품을 팔았으나 아직 실마리를 풀지 못했다. 투박한 질그릇 조각과 부드러운 사기 조각 등 제작시기도 달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밝혀보리라 다짐해본다”

첫 수에선  꽤 깊게 뿌리내린 / 6년근 도라지의 깊은 뿌리 캘 때마다 / 심심찮게 나오는 사기 조각인데 개수만큼 / 모양도 다양하다/. 그래서 호기심이 동했다.
       
둘째 수에선 실마리 풀지 못해 여기 저기 나대는 시인이 보인다. / 오백 년 구천동 목장 가마터가 분명한데 / 어설픈 눈썰미라 / 실마리 풀지 못해 / 안달이다. 문헌을 뒤지고 발품을 팔았으나 별무소득이었으니 / 온 사방 나대어 봐도 도통 알 길 없어라 /하고 자탄한다.

셋째 수에선 빈 가슴 바람으로 채운다. / 하루에도 수십 개씩 마주치는 사금파리 /다. 더러는 질그릇 조각이, 더러는 부드러운 사기 조각이다. 저마다 지닌 / 그 사연을 듣고파서 귀 기울여 보았지만 / 어쩌랴 / 빈 가슴 채우고 마는 산등성이의 바람소리 / 뿐이었다.

애향도 각각이다. 어떤 이는 빛바랜 어머니의 사진인양 가슴에 지녔는가 하면 어떤 이는 고향을 지키고 산다.
이덕재 시인의 생활의 주변엔 작품의 소재가 쌔고쌨다. 그래서 자신에게 허여된 삶의 모롱이를 소중하게 가꾼다. 그리하여 시인의 작품에선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 현실의 모래밭에서 사금을 건져 올리듯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세 앞에 고개 숙이게 되는 것이리라.
 늦깍이로 등단하는가했더니 「개똥벌레」라 제한 시조집을 상제하는 열정을 보였다.
 시인을 보면서 코로나19로 절망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준 주세페 파테르노옹을 떠올렸다.
 지난해 8월 이탈리아 팔레르모 대학에서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령인 97세 졸업생이 탄생했다.굴곡진 삶으로 학업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고 31세에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파테르노옹은 1923년생이다. 어릴 때부터 독서광이었던 파테르노옹은 철도회사를 정년퇴임한 후에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고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94세가 되던 2017년 “지금 아니면 절대 기회는 없다”는 생각에 대학에서 증손자 또래의 학생들과 함께 3년간 공부한 끝에 역사, 철학 학위 취득은 물론 수석 졸업에다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령 대학졸업자라는 타이틀도 얻었다.올해 98세인 파테르노옹은 이제 ‘책을 쓰는 꿈’에 도전 한다고 밝혔다. 꿈이 많다는 것은 축복이다. 한계가 아닌 희망을 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들판의 곡식은 남이 안다고 하지 않던가. 올곧은 선비 같은 시인이기에 향리에서 이장에 추대 되었다고 들었다.성실하고 끈질긴 시인은 ‘가마터’의 퍼즐을 끝내 맞추리라 기대해 마지않는다.낮에 보니 오리나무 가지 끝에 봄이 졸고 있었다. 이제 살 것 같다.<능곡시조교실 제공>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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