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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인자 수필24]'수제비를 뜨며'

기사승인 2020.05.31  20: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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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인자:수필가/수필과비평 작가회 전 거제지부장/수필과비평작가상수상

              수제비를 뜨며
                                             심 인 자

반죽을 한다. 밀가루에 날계란을 깨뜨려 넣은 다음 물을 붓고 주무르기 시작한다. 올리브기름 한 스푼을 넣어야 했는데 깜빡했다. 그러고 보니 소금간도 안 했다. 생각이 깊어지면 빠뜨리는 게 꼭 생긴다.
  수제비를 뜰 참이다. 먼저 육수를 준비한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멸치와 새우, 조갯살로 국물 맛을 낸다. 한참을 우려낸 후 멸치는 건져내고 반죽을 떼어 넣는다. 옆에서 아이들이 거들겠다고 달려든다. 성화에 못 이겨 한 덩어리를 떼어준다.
  작은 녀석이 은근슬쩍 추겨 세운다. 엄마가 해주는 수제비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뱃속에서 못 얻어먹은 수제비를 지금에라도 원 없이 먹으려는지 식탐이 대단하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나 역시 수제비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자주 먹어 반 주식(主食)이었으니 질릴 법도 한데 아니다. 그러나 마냥 즐겁지는 않다. 수제비를 떠올리면 스치고 지나가는 얼굴이 있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를 가져 입덧이 심했다. 그런 중에도 유독 먹고 싶던 것이 수제비였다. 어린 시절 숙이네 집에서 먹던 수제비여야 했다. 그 수제비를 먹으면 살 것 같았다. 먹고 싶은 것을 못 먹으면 짝눈 아이가 태어난다는데도 난 차마 숙이네 집에 갈 수 없었다. 
  내 어렸을 때 우리 동네는 거의가 다 가난한 살림을 이루고 살았다. 꽁보리밥에 풋고추를 찍어먹으면 진수성찬이었고 밥 대신 고구마와 감자로 끼니를 잇기도 했다. 달리 벌이가 많았던 것도 아니고 바다에서 조개 캐서 돈을 사거나 겨우 손바닥 만 한 땅에서 일군 식량으로 식구들 건사하기도 빠듯한 때였으니 말이다. 면사무소에서 밀가루를 나눠주기도 했는데 그것이 식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집도 있었으니 배 곪는 날도 많았다.
  가난이란 게 뭔지 몰랐다. 놀기에 급급했으니 말이다. 살림을 일구는 것은 어른들 몫이었다. 해가 뜨면 모여서 진탕하게 놀다 해질 무렵에나 집을 찾아들어갔으니 어른들이 어떻게 하루를 지내는지 알바가 아니었다.
  숙이네 집 뒷동산은 유일한 우리들 놀이터였다. 그 애 집은 모퉁이를 돌아가야 보였고 외따로 있었다. 뒷동산은 두 개의 무덤이 있었고 주위가 넓고 펑퍼짐해서 놀기에 적격이었다. 더구나 수심이 얕은 바다가 바로 앞이었으니 들과 바다로 쏘다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밥 먹으러 가면 붙잡혀 못 나올까봐 점심도 걸렀다. 그러나 노상 굶지는 않았다. 새참 내어가느라 밭에서 돌아온 숙이어머니가 커다란 양푼에 수제비를 한가득 퍼 담아 주고 나갔기 때문이다. 수제비와 신 무김치가 다였다. 머리를 맞대고 정신없이 먹었다. 왜 그리 맛있던지. 질리지도 않았다. 일에 쫓긴 숙이어머니는 남은 반죽을 납작하게 만들어 덩어리째 넣어 끓였다. 그걸 아는 우리는 서로 차지하려고 전쟁이었다. 젓가락에 먼저 꽂으면 임자였다. 똑같은 맛일 텐데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했다. 그 많던 수제비는 국물도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노느라 허기진 배를 채웠다.
  지금 생각하니 참 철이 없었다. 보릿고개도 있었고, 식구들 또한 많았으니 분명 귀한 밀가루였을 것이다. 그걸로 매일이다시피 남의 집 아이들 건사까지 했으니 허기진 시대에 참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을 가진 분이었다.
  종횡무진하며 재미나게 지내던 유년시절도 끝이 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우리들은 갈등이 많았다. 중학교를 갈 것인지, 아님 집에서 살림하며 어머니 일을 거들 것인지. 결국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장다리꽃이 필 무렵 숙이는 대처로 나갔다. 줄줄이 딸린 동생들을 위해 진학을 포기한 것이다. 친구를 잃은 허망한 마음에 참 쓸쓸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가서는 곧바로 편지를 보내왔다. 고달픈 대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마음이 구구절절 적혀있었다. 고향 집과 우리들 생각에 편지는 늘 얼룩져 있었다. 집과 식구들 소식을 궁금해 했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있었다.
  일년에 두어 번 명절날 숙이를 볼 수 있었다. 볼 때마다 숙이는 달라갔다. 파마머리에 예쁜 구두를 신고 세련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결혼한다는 얘기를 했다. 딸을 낳았다는 소식도 들었다. 시간이 흘러 나 역시 결혼을 했다. 숙이가 왔다는 것이다. 친정에도 들릴 겸해서 숙이를 찾았다. 몹시 반가워했다. 숙이는 큰 딸아이와 두리 뭉실 불러오는 둘째를 뱃속에 가지고 있었다.
  숙이네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넘쳤다. 지지리도 가난한 살림이었다며 숙이어머니가 눈시울을 붉혔다. 예전과 많이 달라져있었다. 허름하던 집 대신 아담한 양옥이 근사했고, 코흘리개 동생들도 줄줄이 장성하여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어느새 넉넉한 살림을 일군 숙이네 집이 든든해 보여서 참 좋은 마음으로 집에 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숙이 소식을 들었다. 뱃속에 든 둘째가 사산되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다 병원에 왔을 때는 이미 산모의 목숨마저 건지지 못할 상태였다는 것이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눈물만 앞섰다. 그 지경이 되도록 병원에 데려가지 않은 숙이 남편까지 원망스러웠다.
  그 뒤 난 친정을 살짝 다녀왔다. 숙이어머닐 만날까싶어서였다. 그런데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 마주치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물을 쏟았다. 곁에 서있는 내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그 때문에 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를 볼 때마다 오죽 한스러울까. 잘 먹이지 못하고 공부 못 시킨 것 때문에 늘 가슴아파했는데. 그런 딸이 앞서 갔으니 그 애절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것이며 또 그리움의 깊이를 어떻게 잴 수 있단 말인가. 내 마음도 아직 숙이를 놓지 못하고 있는데 당신의 가슴에 묻은 자식 생각을 하루인들 놓을 수 있을 것인가.
  이젠 숙이를 부를 수가 없다. 친정에 가도 소식을 들을 수가 없다. 그 애에게 그런 일만 없었다면 지난 시절 우리들의 도란도란 속삭이던 추억을 끄집어내어 같이 반죽할 건데. 이제는 숙이의 부재로 인하여 그리움과 애끓음만이 비가(悲歌)가 되어 내 가슴을 적신다.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아들 녀석이 양껏 채운 배를 보이며 날 향해 엄지손가락을 펴 보인다.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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