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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수필:이양주]'내가 깨어나지 못한 시간에도'

기사승인 2020.05.30  04:4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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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양주:2012년〈수필과 비평〉등단/‘2014 젊은수필’선정/한국문인협회/거제대학평생교육원수필반수료/계룡수필문학회/제8호인간문화재이수자/눌산문예창작교실수강

내가 깨어나지 못한 시간에도(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이양주

 무명(無明)을 걷어 내고 있는 길 위의 기도가 서슬 푸르다. 정월 새벽 세 시, 연이은 한파와 폭설에 웅크려 있던 겨울 산의 적막을 흔들며, 청량한 도량석이 삼라만상을 깨운다. 도량석은 일명 목탁석(木鐸釋)이라고도 한다. 늘 깨어있으라고 눈 뜬 물고기의 형상으로 화현한 목탁과 스님의 염불 소리가 요사채를 지날 때마다 하나둘 방에 불이 밝혀진다.
  새벽 예불을 모시러 길을 나선다. 밤새 깨어있던 달이 지다 말고 나뭇가지 사이로 달길을 열어준다. 주위가 고요하니 시린 달빛에 선명하게 찍히는 발걸음 소리가 조심스럽다. 사방에 적막이 가득하다. 적막 속에 들어 있는 고요가 나를 감싼다.
  가재도구 하나 없는 빈방에서 지내서인지 내가 가볍다. 지금 걷고 있는 내 몸뚱이 하나, 이게 나의 전부가 아닐까. 내 집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떠나와 돌아보니, 사실은 내 것이 아닌 잠시 허공에 지은 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연을 따라 내가 있는 곳, 지금은 이 길이 내 존재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길 위에 서서 해 본다.     대웅전을 향한 계단을 오른다. 수덕사 대웅전은 높이 있어서 좋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기면서 나를 아래에 내려놓는다. 대웅전 뜰 앞엔 빈 공간이 많다. 여느 사찰들이 경쟁하듯 전각이며 탑이며를 계속 세우고 채우기에 급급 하는 모양새에 반해, 수덕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두 개의 탑신 외에는 아무것도 들여놓지 않았다. 자신의 절터는 마음으로 채우고 비우면 될 것이다.
  법고를 시작으로 법전 사물이 차례대로 울린다. 법고(法鼓)는 가죽을 지닌 동물 또는 축생을 위하여, 운판(雲板)은 날짐승, 목어(木魚)는 수중 생명, 범종(梵鐘)은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 지혜가 생기게 하고 지옥 중생까지 제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세상의 모든 존재를 위한 소리의 진언이 사방에 울려 퍼진다. 법당에 들어야 하는데 소리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법고각 주변에서 서성거린다.
  며칠 전 폭설이 내려 잔설이 묻은 바람 끝이 맵다. 어둠마저 얼어붙은 듯하다. 추위에 대비하여 완전 무장을 했는데도 냉기가 몸을 파고든다. 스님들은 오죽하랴만 법고를 울리며 펄럭이는 장삼 자락 끝이 살아 있다. 겨울 한기도 서슬 푸른 수행자들을 움츠리게 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안의 냉기를 단단히 단속하였으니 바깥의 냉기쯤은 끄떡없는가 보다.
  수행의 혹독함을 견디게 하는 저 힘은 무엇인가. 삶의 고뇌와 그 집착을 벗어나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수도자들은 어떤 수행을 하고 있으며, 수행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나는 늘 궁금했다. 지금 행하고 있는 것은 이타(利他)다. 혼자 힘으로는 어림없다. 기도가 자신만을 향해 있다면 저 힘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수도자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이타를 행하고 있으며, 깨달은 뒤에도 이타를 행할 것이 분명하다.
  걸음을 법당으로 옮긴다. 국보 제49호인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후기 목조건물로 문화재 보호를 위해 촛불로만 어둠을 밝힌다. 기도문을 따라 하고 싶지만 경전을 펼쳐도 보이지 않는다. 마음속의 경전이 있으니 굳이 애쓸 필요 없다고 하는 것 같다. 함께 예불을 올리는 사람들의 마음속 경전은 같을까.
  법당 안까지 점령한 매서운 한기에도 스님들의 기개는 꺾이지 않고 당당하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외로움과 가난이기에 뼈에 사무치는 추위에도 빈 몸으로 맞서고 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에서 느껴지는 엄정함에 나도 몸과 마음을 곧추세운다.
  노스님께서 수행자의 서원을 다짐하는 의식을 하신다. 이 세상 모든 고액과 고난을 소멸하고, 나라와 중생의 평안을 기원하며, 하루의 안녕을 기원하는 발원을 하신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구성진 소리가 웅숭깊다. 자신이 닦은 선근 공덕을 중생을 향해 회향 발원하는 축원문 한 자 한 자에 실린 기운이 주변을 맑고 평안하게 한다. 소리에서 부드럽고 둥근 곡선이 느껴진다. 노스님의 표정이 궁금하다. 경내에서 당신이 지나가실 때 보았던 자애로운 미소가 떠오른다. 슬쩍 곁눈질 한다. 일심으로 기도하는 부동의 자세가 아니라, 주변을 두루 살피시며, 발이며 손이 큰 동작은 아니지만 마치 춤을 추듯 흐름을 타고 계신다. 도는 딱딱하거나 심각한 것이 아니라 자유 무애(自由無碍)한 것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스님은 수천 번도 더 넘게 발원하고 기도하셨을 것이다. 자신을 위한 발원이나 기도가 아닌 세상을 향한 것이니 얼마나 큰 기운과 열락(悅樂)이 따르겠는가. 도락(道樂)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웅전에서 예불이 끝나자 다른 법당에서도 기도가 이어졌다. 관음전에서 스님 한 분이 홀로 기도를 하고 있다. 대중과 함께할 때의 기운과 혼자 하는 기도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절간을 울리는 외줄기 독경소리에 인정(人情)이 느껴져 가슴이 서늘해진다. 유정(有情)한 관세음보살님이라 중생과 함께 하시느라 간밤에 춥고 외로우셨을 것이다. 어쩌면 스님과 보살님은 서로를 위로하고 있는지 모른다. 온기야말로 도(道)가 아니겠는가.
  새벽 예불이 다 끝났지만, 아직 어둠은 가시지 않았다. 경내를 천천히 돈다. 깨닫지 못한 자에게 어둠은 완고하다. 수많은 세월 속에서도 변질되지 않은 진리를 지키고자 하는 새벽 정신이 하루를 깨어있게 한다. 내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시간에도 수행자들은 먼저 깨어 어둠의 혼미함을 깨우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아침은 쉽게 열리는 것 같지만 세상 곳곳의 성소에서 기도하는 수많은 수행자들에 의해 열리고 있다. 무사한 하루가 그냥 열리고 닫히는 것이 아니다.
  종각 앞 청련당 편액에 걸려있는 만공 선사의 ‘세계일화(世界一花)’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나 산천초목 우주 만물이 하나의 뿌리로 된 한 송이 꽃이라고 설하고 있다. 엄동설한에도 얼지 않고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며 두 손 모아 합장한다.
  저만치 발아래 보이는 세상의 모습이 마치 하나의 바다에 잠긴 듯 고요하다. 곧 여명이 밝아 오리라

서정윤 기자 gjtline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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