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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박기섭]'연해주의 눈물 조선의 눈물'--기획<2>

기사승인 2020.02.12  07:5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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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섭/러시아 프리마미디어 한국특파원(ajr328@naver.com)/전 월간거제 발행인

<기획시리즈2>
축복의 땅 연해주로 죽음의 탈출을 감행한 조선난민들

글 싣는 순서
①조선을 사랑한 레닌
②연해주의 눈물,조선의 눈물
③근현대 한국문학사를 이끈 러시아 문학
*이 기획기사는 기고문으로 본사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편집자>

19세기말 중국은 세계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1860년 베이징조약에서 우수리강 동쪽 땅이 러시아 영토로 편입됐다. 러시아는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40만 평방 킬로미터의 광활한 극동아시아를 획득했다. 그러나 수도 생떼페테르부르크와 제정러시아는 멀리 떨어진데다 당초 버려진 불모지라서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국경 경계선에 출입금지령만 내리고 방치했다. 조선정부는 러· 한 국경분쟁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처로 국경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러시아 월경금지’ 포고문만 발표했다. 이러한 상황은 20년이 지난 188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1869년, 조선 함경도지역에 대흉년이 들었다. 특히 러시아 국경 근처 경흥군 지역에 대기근이 들면서 수많은 아사자들이 발생했다. 겨울이 시작되자 배고픔과 추위를 못 견딘 농민집단이 미국상선에 침입해 선내의 물건을 모조리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외교문제로 곤욕을 치른 조선당국은 즉시 중앙 진상조사단을 파견했고, 함경도 경흥군청은 용의자 조사에 나섰다.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자 경흥읍 주민 96가구는 중대결심을 하게 된다. 이들은 중앙 진상조사단이 당도하기 이틀 전, 죽음을 각오한 탈출을 감행했다. 국경수비대를 뚫고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지신허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지신허로 들어온 이유는 6년 전부터 이 지역에 조선인 70여명이 터전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죽음을 각오한 탈출은 계속 이어져 두 달 만에 5,000여명의 조선인이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들어갔다. 제정러시아 당국은 당황했다. 대규모 조선인 이주는 조선 정부와 심각한 외교적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다. 곧바로 강제추방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5,000여명에 달하는 불법 이주자들은 집단으로 조선으로의 귀환을 거부했다. “조선으로 돌아가면 어차피 죽을 것. 차라리 연해주에서 죽겠다.”면서 결사적으로 버텼다. 결국 러시아 당국은 시베리아 벌판의 개발을 위해 이들의 이민을 수용하게 된다.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러시아문화에 빨리 적응해 나갔다. 연해주에는 조선처럼 관료들의 수탈도 없었고, 조선귀족들의 박해도 없었다. 뿌린 대로 거둬들일 수 있는 연해주는 조선 난민들에게 축복의 땅이었다. 제정 러시아정부도 광활한 시베리아 영토를 농지로 개간하는 조선인들의 근면성을 높이 사 조선인 우대정책을 펼쳤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완성되기 이전까지 연해주는 조선인이 러시아인보다 많게 됐다. 1902년 제정러시아 인구조사 기록을 보면 러시아 전체의 조선인은 약 32,000명, 1910년 쯤 에는 6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중 대부분이 연해주에 거주했다.

그러나 러· 일 전쟁이 종료된 3년 후, 제정 러시아정부의 조선인 정책이 갑자기 변했다. 조선을 합병한 일본이 연해주 조선인들의 잠재력을 의식해 러시아정부에 압박 정책을 요청한 것이다. 곧 ‘재 연해주 조선인 배척법’이 제정됐다. 조선인들은 수십 년 동안 일구었던 농장을 몰수당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대거 해고됐다. 이후 오랫동안 조선인 수난시대가 계속됐다. 그 수난의 세월은 러시아에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 날 때까지 8년 동안 이어졌다.

연해주의 거물 최재형, 조선독립운동 ‘기초’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으로 조선이 세계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울분을 못이긴 조선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결했다. 뜻을 가진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국외로 빠져나갔다. 신채호(조선건국훈장,독립유공자), 이상설(조선건국훈장,독립유공자) ,안중근(조선건국훈장,독립유공자) 등 조선의 지도자들이 대거 연해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연해주 한인사회에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의 저력을 키워나갔다. 이들이 입성한지 5년 만에 연해주는 조선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우뚝 섰다.

연해주 조선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중심인물은 최재형(조선건국훈장,독립유공자)이었다. 한일합병 이후 조선에서 수많은 귀족출신 독립 운동가들이 연해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최재형의 지휘를 받았다. 최재형은 러시아 주류사회에 진입한 인물로 당시 극동러시아 경제계를 호령하는 재벌이었다. 그는 이미 1907년부터 일제의 야욕을 간파하고 연해주 한인사회에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최재형은 조선 함경도 노비출신이었다. 그는 어릴 적 러시아 상선 선장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교육을 받은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최재형은 러· 일 전쟁 당시 군수산업에 뛰어들어 거액을 벌어들였다. 그는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황제 니콜라이 2세를 2번이나 알현하는 등 극동러시아에서 권력층으로 부상했다. 제정 러시아정부는 최재형을 연해주 크라스키노지역 도현(지역 행정대표)으로 임명했다. 권력과 금력을 양손에 거머쥔 최재형은 그러나 남달랐다. 거금을 들여 신한촌 한인들을 위해 학교(32개교 설립)를 세웠고, 한인사회 복지사업에 열중했다. 그를 존경한 연해주 한인사회는 거의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를 걸어 경의를 표할 정도였다.

한일합병으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연해주로 몰려오기 1년전, 최재형은 엄청난 사건을 벌인다. 그는 1908년 조선 최대의 독립운동단체 ‘동의회’를 창립했다. 국경 근처 조선 함경도에서 독립의병군 대장으로 활동하던 홍범도(조선 건국훈장,독립유공자)도 참여했다. 총장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 체제로 출범했다. 최재형은 ‘동의회’ 산하에 무장독립군 부대(대한의군)를 편성했다. 총대장에 이범윤, 참모 중장에 안중근을 임명했다. ‘동의회’ 독립군은 창설 되자마자 홍범도 부대와 연대해 러· 한 접경지역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최재형을 제거하기위해 갖은 술책과 농간을 다부렸다, 그러나 러시아 주류로 들어간 극동러시아 경제계의 거물 최재형을 일본도 어쩌지 못했다. 당시 최재형을 제거하지 못한 일본은 1년 후 ‘경천동지‘할 만한 사건을 접하게 된다.

1909년 2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외곽 라게르산 자작나무 숲에서 안중근( 조선독립운동의 최고 영웅. 독립유공자)과 11명의 조선독립군들이 모였다. 최재형의 밀명을 받은 이들은 일제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이며 일본인들의 영웅인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며칠 후 12명은 최재형의 집 지하 밀실에서 각자의 네 번째 손가락을 잘랐다. 이들은 흐르는 붉은 피로 ‘대한독립’이라는 글자를 흰 광목천에 새겼다.

그로부터 8개월 후인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 하얼빈 역에서 마주한다. 제정러시아 의장대의 사열을 받던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이 쏜 총탄에 심장이 뚫려 즉사했다. 안중근이 쏜 권총은 최재형이 모스크바에서 구입해 건네준 브라우닝식 8연발 단총이었다.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체포돼 형무소에 수감됐다. 세계 정치계의 거물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 당하자 한· 중· 일은 벌컥 뒤집혔다. 러시아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세계는 크게 놀랐다. 이 사건으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이후 오랫동안 중국의 항일단체들과 러시아 혁명정부로부터 높은 평가와 대접을 받게된다.

안중근은 6개월 후 법정 최후진술에서 “나는 연해주에 있는 ‘동의회’소속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다”라고 신분을 밝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안중근이 사형당한 후 그의 유품에서 어머니 조마리아의 편지가 발견된다. 편지내용이 알려지자 연해주 한인사회는 슬픔과 감동의 물결로 파도쳤다. 안중근이 투옥 되자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가 보낸 편지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다.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네가 죽음을 연장하기 위해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본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일을 행한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세상천지에 어느 어머니가 저승으로 먼저 가는 아들에게 당당하게 죽으라고 할 수 있을까. 이 편지 한 장으로 연해주 조선독립운동은 더욱더 굳고 강건해져갔다.

연해주의 눈물, 4월 참변으로 신한촌 ‘피바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 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일본영사관은 러시아 당국에 조선독립 운동가들이 주도하는 ‘권업회’의 활동중지와 불온선인들의 추방을 요구했다. 당시 러시아는 독일에 대항해 일본,영국.미국등과 연합전선을 맺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러시아는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조선 고종황제의 헤이그 밀사였던 이상설을 비롯, 30여명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귀양가거나 추방 당했다, 조선독립운동 비밀조직 ‘권업회’의 해산과 함께 최재형 또한 활동이 제한됐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연해주는 조선독립운동의 암흑기였다. 일본군이 연합군의 이름으로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제집 드나들 듯 하는 상황에서 적극적인 항일 운동은 무리였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끈질김은 지하활동으로 명맥을 이어갔고, 3년이 지난 후 또 다른 강력한 항일운동으로 나타난다. 1917년 ‘전러 한족중앙회‘가 창설됐다. 연해주의 조선 독립운동 가들은 이 여세를 몰아 1919년 3월, 조선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회의’를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대항도 만만치 않았다. 동서남북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는 조선 독립운동단체들의 씨를 말리기 위한 비밀 토벌 작전을 계획한다.

이해 초 1차 세계대전 연합군임을 핑계로 연해주에 주둔해 있던 미군이 철수를 시작했다. 일본군도 러시아 혁명정부에 철병을 선언했다. 일본군은 철병의 조건으로 조선인에게 무기를 공급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러시아 붉은 군대 또한 연해주 일본주둔군에 필요한 숙영, 운수, 통신 등에 지장을 주지 말 것을 제시했다. 철병하겠다는 선언에 혁명정부는 일본군의 의견을 모두 수용했다. 일본군은 4월5일에 ‘철병 조약문’에 서약하기로 약속했다. 일본군의 약속을 믿은 연해주 붉은 군대는 경계태세를 해제하면서 4월 4일 지휘관 다수에게 주말휴가를 즐기게 했다. 그러나 그날 밤 일본군 2개 연대가 연해주 붉은 군대를 기습했다. 일본군은 동이트기도 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완전히 점령했다.

순식간에 붉은 군대 2,000여명이 무장해제 되고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블라디보스토크 조선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일본군은 제정러시아 백군을 모두 석방시켜 오히려 붉은 군대를 체포케 했다. 붉은 군대 전사들은 무라비요프, 아무르스카로 보내졌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열차 화통에 던져져 죽임을 당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블라디보스토크 조선 마을)과 우수리스크 지역의 상황도 처참했다. 일본군은 연해주의 수백 명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하면서 저항하는 그 가족들을 현장에서 즉결 처분했다. 또 다른 수백 수천 명의 조선인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죽어갔다.

연해주 조선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가족의 안위를 걱정해 도피하지 않았다.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죽어도 좋다. 너희는 더 살아야 한다.”며 가족들을 먼저 도피시켰다. 다음날 ‘권업회‘ 간부 김이직, 엄인섭과 함께 체포된 최재형(63세)은 우수리스크 사베스카야 산기슭에서 총살당했다. 당시의 상황을 ‘끄라스노예즈나야’지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일본군대는 조약을 체결하자고 빙자하고 야밤에 러시아군을 습격했다. 그 중에 도망하여 생명을 구한 자 외에는 살아남은 자는 없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같은 참상을 당했다. 이튿날 아침 큰 거리에 주검이 산과 같았으며, 온전한 집이 하나도 없었다. 일본군은 항내에 있는 상선 수십 척을 탈취하고 도시의 모든 보물을 쓸어갔다.’

 일본군은 파괴와 학살을 벌인 뒤 연해주를 완전히 장악했다. 연해주의 모든 한인조직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계획된 친일단체를 세우고 악랄하게 통제했다. 조선의 독립 운동은 희미해져 갔다. 도망쳐 살아남은 독립운동가들 조차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다. 또다시 연해주 한인들에게 길고긴 고난의 세월이 시작됐다.

참고 문헌:

조동걸(1989), 한말 의병전쟁(독립기념관)
김준엽(1989), 한국독립운동사의 재조명(교보문고)
박영석(1992), 만주 노령지역의 독립운동(독립기념관)
서중석(2010),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돌베개)
이현희(1992), 한국광복군(독립기념관)
최백순(2017), 조선 공산당 평전(서해문집)
안중근 기념관 자료실
프리마미디어 한국 특파원 박기섭 기자 (ajr328@naver.com)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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