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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박기섭]'조선을 사랑한 레닌'--기획시리즈<1>

기사승인 2020.01.22  19:4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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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섭/러시아 프리마미디어 한국특파원(ajr328@naver.com)/전 월간거제 발행인

<기획시리즈1>
독립운동 자금 200만 루블(현 2억2000만 달러 상당) 지원

글 싣는 순서
①조선을 사랑한 레닌
②연해주의 눈물,조선의 눈물
③근현대 한국문학사를 이끈 러시아 문학
*이 기획기사는 기고문으로 본사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편집자>

1920년 4월 어느 날 새벽, 모스크바 한 주택가 모퉁이에서 1대의 마차가 어둠속을 헤치고 도시를 빠져나갔다. 좌·우·전·후 무장 러시아인이 호위를 하고 중년의 고려인이 마차를 몰았다.
잠시 후 이들은 모스크바 외곽을 완전히 빠져나가 몽골을 향했다. 마차를 모는 인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사 박진순이었다. 4명의 무장 러시아인은 러시아 혁명정부 외무차관 카라한이
보낸 경호 병사였다. 박진순은 레닌이 조선의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낸 350kg에 달하는 금화 일곱 궤짝을 운반 중이었다.

박진순은 동행했던 한형권과 이동경로를 논의한 결과, 내전중인 제정러시아 백군 점령지를 피해 몽골루트를 택했다. 몽골 고륜을 돌아 극동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상해로 가는 루트가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최단거리인 러시아 횡단 루트가 있었지만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횡단 루트인 노보시비르스크와 치타 입구 도처에 백군·마적단·일본스파이 등이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조선독립운동 지원금, 10,000km를 돌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떠나기 며칠 전 박진순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사자격과 코민테른 (국제공산당 ) 집행위원 자격으로 은밀히 레닌과 독대했다. 조선독립 방향과 러시아 혁명정부의 지원 범위를 논의했다.
 당시 레닌은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제 일성으로 “모든 강대국들은 약소국가 식민지를 돌려주라”고 공표했다. 조선을 비롯해 베트남·필리핀.인도 등 식민국가 독립 운동가들은 환호했고,
줄지어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레닌과 박진순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토론을 이어갔다. 레닌이 말했다. “조선독립운동을 위한 필요자금이 얼마면 되겠소?” 예상치 못한 레닌의 질문에 당황한 박진순은 “10만 루블 정도면 되겠습니다.”라고 엉겹결에 답했다. 레닌은 폭소를 터트리면서 “그 정도 자금으로 무슨 독립운동을 하오? 우선 200만 루블을 드리리다!” 박진순은 놀람과 기쁨에 말문이 막혔다.

당시 혁명러시아의 사정은 경제가 혼란에 빠졌고 계속되는 인플레이에 루블의 국제통화가 정지될 지경이었다. 또한 볼가강과 돈강유역 농업지역에 흉년이 들어 수많은 민중이 고통을 받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레닌이 건네는 조선 독립운동자금은 파격 그 자체였다. 200만 루블(현 2억2,000만 달러 상당)은 조선 무장독립군 5000여명의 10년간 운영경비를 감당하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극동러시아 항일전선에 지각변동을 일으킬만한 엄청난 규모의 군자금이었다. 레닌과 러시아 혁명정부는 코민테른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구호‘만국의 노동자와 피억압민족은 단결하라’라는 정신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다음날, 박진순은 수행했던 한형권을 시켜 1차 지원금 60만 루블 중 20만 루블을 모스크바 은행에 예치하고 40만 루블을 금화로 바꿔 마차에 실었다.

모스크바에서 중국 상해까지 장장 10,000km.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제정러시아 백군과 마적단,일본군 첩자를 피해 모스크바―몽골―블라디보스토크―상해루트를 택했지만 러시아 내전은 하루가 멀다 하고 홍군 백군의 전선 지형이 바뀌는 상황이었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두 달 만에 치타 안전가옥에 도착한 박진순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김립을 만났다. 치타에서 상해까지의 운반책임은 김립이 맡기로 계획돼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장차 조선독립운동 세력들이 영원히 분열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김립이 말했다. “박동지, 볼셰비키 혁명정부가 지원한 자금은 사회주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써야하오.”

 임무에 동행한 한형권도 김립의 의견에 동조했다. 사실 박진순은 모스크바에서 치타까지 오는 동안 독립자금 사용처에 대해 깊은 갈등을 했었다. 박진순은 김립과 한형권의 의견에 힘입어 결단을 내렸다. 박진순·한형권·김립은 종착지인 상해로 가지 않고 독립자금 금궤를 블라디보스톡 한인촌 한 가옥 지하 밀실에 은닉했다. 이들은 그로부터 6개월 동안 극동러시아지역 한인사회당, 전로공산당 등 10개 단체에 독립운동자금을 배포했다. 홍범도(대한민국 건국훈장.독립유공자)의 독립군부대에는 거금을 전달했다. 일부는 중국,일본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지원했다. 자금을 받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자신들의 대일 투쟁 거점을 동서남북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한인사회당 이태준은 백군 점령지역인 북만주까지 진출하다가 붙잡혀 총살형을 당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레닌 조선독립운동 지원금 ‘쟁탈전‘

이 소식을 접한 중국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노했다.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국무총리 이동휘(대한민국 건국훈장.독립유공자)에게 레닌이 보낸 독립자금 사용처에 대해 경과보고를 요구했다.

 이동휘가 당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지도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동휘는 경과보고를 거부했다. “레닌의 독립자금은 임시정부와 관계가 없지 않소?”라는 한마디 말로써 대신했다.

이동휘는 혁명러시아의 조선독립운동 지원금은 당연히 사회주의 운동자금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당시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도 구미위원회가 모금한 조선독립운동자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있었다.

이동휘의 강력한 저항에 임시정부 수뇌부는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경무국장 김구(대한민국 건국훈장.국가유공자) 세력만 분노를 참지 못하고 거세게 항의했다. 오히려 내무총장 안창호(대한민국 건국훈장.국가유공자)가 김구를 말릴 정도였다. “김동지,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게 보낸 자금인데 그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지 않소?”.

그러나 김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안창호는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의 평등한 협조세력으로 인식했고, 김구는 사회주의 독립운동단체도 임시정부 하부조직이라는 서로 다른 견해차가 있었다.

임시정부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후 며칠 되지 않아 알 수 없는 세력들이 레닌의 지원금을 김립이 개인적으로 사용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수개월 동안 출처를 알 수 없는 루머가 한인사회에 퍼졌다.

의문이 확산되자 한인사회당 대표자회의가 열렸다. 김립은 조목 조목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회의결과 한인사회당은 김립의 결백주장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인사회당만의 결론으로 끝나지 않았다.

1921년 12월,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 자베이 거리에서 김립이 피살 당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가 보낸 오병직·노중균이 도로변에서 김립을 암살 한 것이다. 김립의 시신은 며칠 뒤 당시 경성(현 서울)에서 고려공산당을 이끌던 김철수(대한민국 건국훈장.국가유공자)에 의해 수습됐다.

김구는 후일 ‘백범일지’에서 김립의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기록했다. 이러한 평가는 1945년 해방이후 50년 동안 김구의 권위에 의해 정설로 굳어져왔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구소련 비밀문서 코민테른 제1대 중앙집행위원회원 쿠시넨 훈령이 공개되면서 김립의 죄명에 대해 반론이 일어났다. 한국외대 반병률 교수는 ‘김립과 항일 민족운동’이라는 저서를 통해 구체적으로 의문점을 제기했다. 반교수는 저서에서 김구가 주장한 김립의 ‘정당한 응징’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김립의 죽음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간의 주도권 싸움의 희생양이었다고 주장했다. 반교수는 그 근거로 당시 러시아 혁명정부가 조사한 ‘조선독립운동 지원금 진상조사’ 보고서를 제시했다. 당시 러시아 혁명정부 진상조사단은 김립의 지원금 횡령혐의에 대해 무죄로 결정했던 것이다.

 조선독립운동단체 ‘두 동강‘ 러시아 혁명정부도 등 돌려

 김립이 암살당하자 중국 상해 한인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김립의 장례식장에 조문 온 경성(현 서울) 사회주의운동 지도자 안병찬 마저 의문의 죽임을 당하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분노한 청장년 사회주의 독립 운동가들은 김구의 암살을 결의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 지도부는 “독립운동 동지끼리 더 이상 싸움은 안 된다.”고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격분한 청장년 사회주의 독립 운동가들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같은 보고를 접한 러시아 혁명정부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1922년 초, 레닌은 극동러시아 외무대신에게 진상조사를 명했다. 외무대신은 상해와 극동러시아에서 활동 중인 한인사회당 소속 혁명가 전원을 상대로 조사에 들어갔다. 이동휘·박원순·한형권·김철수 등 수십 명이 소환됐다. 독립운동지원금 사용처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청문회가 계속됐다. 그는 3개월에 걸쳐 조사한 결과를 1922년 8월 18일 보고서로 제출했다. 결론은 ‘상해 공산당 자금횡령 근거 없음’ 이었다. 곧바로 레닌의 러시아 혁명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호의를 거둬들였다.

 사회주의 세력은 공식 논평을 통해 “독립자금 출처가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고 이를 김립이 사회주의 독립운동단체에 지원한 것이 무슨 문제냐.”며 임시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경무국장 김구의 강력한 처벌도 요구했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는 원만한 사태수습을 위해 경무국이 사과하는 선에서 절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정도 절충안으로는 사회주의 독립 운동단체 내부의 격앙된 분위기를 달랠 수가 없었다.

급기야 1923년 1월, 조선독립운동단체를 총 망라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됐다. 임시정부를 새로 만들자(창조론)와 개조하자(개조론)는 논의가 치열하게 대립했다. 이 대회에는 조선반도,상해,만주,북경,연해주,미국 등지에서 120개 단체대표 전원이 참석했다. 이 회의 자금은 레닌이 준 독립운동자금 중 모스크바 은행에 예치해 두었던 20만 루불 중 일부를 사용했다. 회의는 5개월 동안 진행됐다. 그러나 단일기구의 새로운 임시정부 구성에 실패했다. 이로부터 조선독립운동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각자 노선을 택함으로써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임시정부는 전체독립운동 세력의 대표자라는 위상이 약해졌고, 일부 세력의 대표기구로만 인식됐다. 허울뿐인 단체로 전락되면서 대부분 독립운동자금 지원이 끊겨버렸다. 대통령으로 있던 이승만 마저 외면했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외무성에 보낸 ‘임시정부 궁상’이란 일제 사법문서에 따르면 ‘상해 임시정부 직원 70명 중 대부분이 월급을 못 받고 있다. 직원들의 비참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김립의 암살사건이 있었던 당시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안창호의 흥사단 3개 세력으로 구성돼 있었다. 191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은 재임 6년 동안 상해에는 6개월 밖에 머무르지 않았다. 구미위원부의 조선독립지원금마저 임시정부에 보내지 않았다. 미국에 머무르면서 주요사항만 결재할 뿐이었다. 여기에다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제연맹’에 조선을 신탁통치 하자는 청원을 하는 바람에 조선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격분시켰다. 당시 지도자급 독립운동가 신채호(대한민국건국훈장.독립유공자), 박은식(대한민국건국훈장.독립유공자), 김창숙(대한민국건국훈장.독립유공자) 등은 “이승만이 조선민족대표라고 차칭하면서 미국의 노예가 되기를 원한 것은 광복운동사에 큰 치욕”이라고 맹비난했다.

결국 이승만은 이런 일들이 겹쳐 1926년 탄핵 당한다. 이처럼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도 알력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발생한 김립 암살사건은 조선 독립운동 조직전체를 와해 직전까지 몰고 갔다.

 “조선독립 운동가들은 레닌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레닌의 조선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중국을 비롯 베트남.필리핀.몽골.인도 등 여러 나라가 있었지만 조선의 독립운동만큼 후원하지 않았다. 레닌의 파격적인 애정에 사회주의 조선독립 운동가들은 모스크바로 몰려들었다. 임시정부 민족주의진영 지도자 안창호까지 레닌정부와 연대하여 조선독립운동의 기초를 다지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승만의 반대에 부딪혀 안창호의 제안은 관철되지 못했다.

1922년 7월 1일, 모스크바에서 ‘원동민족대회(피압박민족대회)’가 열렸다.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각 나라의 지도자들이 모였다. 조선을 비롯한 중국. 몽골. 부랴트. 인도에서 144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홍범도,이동휘,여운형,조봉암,김단야 등 당시 사회주의 조선독립운동을 대표하던 대부분 인사들이 참가했다. 참가국 중 가장 많은 숫자(56명)를 기록했다. 1년 전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 회의’에서 미국과 영국은 식민지 조선에 대해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김규식 등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도 조선독립 이라는 희망을 품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크렘린은 한인지도자들을 융숭한 대접으로 화답했다. 코민테른 위원장 지노브예프는 대회사에서 “왜 워싱턴 대회에서 코리아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었는가?”라는 연설로 조선의 민족,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마음을 달랬다.

 대회 한 달 전, 청산리전투의 영웅 조선독립군 대장 홍범도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고려혁명군 대장 자격으로 ‘원동민족대회’에 참가한 홍범도에게 러시아 혁명정부의 거물이 찾아왔다. 러시아혁명의 탁월한 전략가 트로츠키였다. 레닌과 함께 러시아혁명을 주도했던 500만 붉은 군대의 창시자 트로츠키를 만난 홍범도는 적잖이 놀랐다. 트로츠키는 놀라는 홍범도를 반기면서 그를 레닌에게 인도했다.

레닌은 홍범도가 항일투쟁전선에서 러시아와 함께 공동으로 대항해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을 치하했다. 회동이 끝날 무렵 레닌은 준비해 둔 선물을 전달했다. 고려혁명군 대장에 어울리는 군복과 군모, 레닌과 홍범도의 이니셜이 새겨진 권총 그리고 금화 100루블을 건넸다. 조선독립군과 홍범도에 대한 레닌의 무한한 애정표시였다.

박기섭 기자

그로부터 5년 후인 1927년, 홍범도(조선건국훈장.독립유공자)는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한다. 조선독립을 위한 공산당 입당이었다.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홍범도의 의지였다.

당시 사회주의 사상은 고향을 떠나 하루하루가 풍잔노숙인 독립운동가들을 인도하는 북극성이었다. 여기에다 레닌의 특별한 조선사랑이 더해지면서 조선독립 운동가들을 모스크바로 이끌었다. 경성(현 서울),상해,극동러시아의 수많은 사회주의 독립 운동가들은 레닌학교에 입교해 레닌사상을 탐구했다, 이들은 레닌이 보내준 조선독립 운동 자금을 평생 동안 잊지 않고 살았다.

참고문헌:
고정휴(2007), 상해임시정부의 초기 재정운영과 차관교섭(한국사학보29, 209-247)
김준엽(1989),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청계연구소 출판국)
로버트 스칼라피노(2015), 한국공산주의 운동사(돌베개)
반병률(1998), 성재 이동휘 일대기(범우사)
반병률(2014), 홍범도 장군(한울아카데미)
이정식(1974), 김규식의 생애(신구문화사)
이애숙(1999), 상해 임시정부 참여 세력의 대소교섭(한국역사연구회32, 2-30)
고려공산당 상해파 자금결산 규명위원회 결과보고서(1922)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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