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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박기섭]'세계를 제패한 한국조선업②'

기사승인 2020.01.19  19: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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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섭/러시아 프리마미디어 한국특파원(ajr328@naver.com)/전 월간거제 발행인

 세계를 제패한 한국조선업② - 기획/특집
한국정부, 재벌그룹1.2.3위 조선업에 ‘올인’ 유도
러시아 프리마미디어 한국 특파원 박기섭 기자 (ajr328@naver.com) 

한국조선업의 세계 제패에는 4명의 일등공신이 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그리고 신동식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다. 정주영, 김우중이 현장 사령관이었다면 신동식은 작전사령관 이면서 막후 설계자였다.

1961년, 대통령 박정희는 한국인 최초로 영국 로이드선급협회 검사관으로 일하던 신동식을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초대 경제수석으로 임명된 신동식은 “인구가 증가하면 해상물동량이 늘어나고 그에 따른 거대선박이 필요하다.”라는 마스터플랜을 제안해 박정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신동식은 1955년 서울대학교 조선공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스웨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선진 조선기술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코큠조선소에서 현장용접공부터 밑바닥 실무를 익힌 그는 설계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의 생각은 오로지 '대한민국 조선 입국’이 목표였다. 1958년, 28세의 나이에 신동식은 조선인의 꿈이라는 영국 로이드선급현회 검사관이 됐다. 당시 로이드선급협회는 전 세계선박의 설계와 건조과정을 감독했다. 로이드 검사관이 승인하지 않은 배는 만들지도 못했고 운항할 수도 없었다. 신동식은 세계적 조선 엔지니어로서 각국을 순회하다가 우연히 일본 도쿄에서 군사혁명정부 수반 박정희를 만난다. 두 사람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의기투합했다.

박정희 정부의 초대 경제수석이 된 신동식은 제일먼저 현대건설 사장이던 정주영을 설득했다. 정주영은 대통령 박정희로부터 “한국 조선업 건설에 앞장서라” 는 엄명을 받고 있었다. 고민하던 정주영에게 신동식은 조선산업의 장밋빛 청사진을 그려 보이면서 현대조선소 건설을 유도했다. 한편으로 대우 김우중과 삼성 이병철에게 경쟁심을 유발 시켰다.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발 맞추어 한국 재계를 리드하는 현대그룹을 부러워하던 대우그룹과 삼성그룹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조선업에 뛰어 들었다.

1970년대 말 한국 재계서열 1.2.3그룹이 각자 회사전체의 운명을 걸고 세계 조선시장에 본격적으로 도전장을 던졌다. 이들에게 후퇴란 있을 수 없었다.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는 조선업의 특성상 그룹전체가 자금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정부의 조선업 육성정책과 보조를 같이했다. 이들 곁에는 항상 한국인 최초의 로이드선급협회 검사관 신경식이 있었다. 한국조선업의 밑그림을 그린 신동식, 그를 한국에서는 ‘조선업의 대부’라 부른다.

 180일 자전거 대장정, 꺼져가던 대우조선을 살린 김우중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신화’는 한국인에게 깊은 인식을 주고 있다. 김우중의 경영스타일은 친화력 9단 + 일중독 + 독불장군 형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을 쓴 김우중을 두고 한국 사람들은 좋은 뜻으로 “일에 미친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가 한창 때에는 체력 좋은 남자비서들이 스케줄을 따라잡지 못해 몇 달에 한번 씩 교체되기도 했다. 김우중의 스타일은 대우조선(현 대우조선해양) 분규사태에 진면목을 과시한다.

1989년, 2년 사이에 대우조선(현 대우조선해양) 3만여 명 노동자가 1만 6천명으로 정리해고 됐다. 전사원의 임금도 동결됐다. 노동자들의 불만이 극도에 달했고 4차에 걸쳐 노동조합결성 시도가 있었다. 그해 7월 울산 현대엔진 노조결성으로 시작된 노동자 대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대우조선도 8월 8일 노조결성을 요구하는 파업이 개시되면서 8월 9일 노조가 결성됐다.

노동자 5,000여명이 연좌 파업에 돌입한 가운데 6차례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합의가 되지 않았고 대우조선 회사측은 직장폐쇄를 통보했다. 전국에서 경찰병력이 1,500여명이 투입된 가운데 열린 마지막 협상도 결렬됐다. 경찰과 노동자간의 집단 난투극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한사람이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사망했다. 당시 변호사였던 노무현(전 대통령) 등 933명이 연행되고 74명이 구속됐다. 인명사고가 난 대우조선 분규로 철강,전자,전기,기계등 수십만 명을 고용하는 후방산업이 휘청 거리며 대한민국 전체가 흔들렸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그룹의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노사분규 회오리에 휘말린 거제 대우조선 현장에 내려갔다. 직접 노조집행부와 협상을 벌였다. 당시 조선산업은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대우조선이 한국정부의 산업합리화업체로 지정되면서 해체 위기에 놓여 있었다. 대우조선의 부실 때문에 대우그룹 전체가 위험했다. 김우중은 그러나 대우조선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조건 대부분을 이해하면서 줄다리기 협상에 들어갔다.

서울시에 있던 대우그룹의 컨트롤 타워를 거제시로 옮겨 15개 계열사를 지휘하는 동시에 대우조선 분규 해결에 '올인' 했다. 180일을 넘게 대우조선 노동자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접점을 찾아나갔다. 새벽에 자전거로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면서 노동조합 간부들의 집을 직접 방문해 위로했다. 자본가에 맹목적으로 배타적이던 노동자들도 김우중의 끝없는 구애에 마음을 움직였다. 노사협상은 원만히 끝났고 3년 후인 1991년, 대우조선은 처음으로 흑자기업으로 올라섰다. 그로부터 대우조선(현 대우조선해양)은 30여 년간 세계조선업계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의 일방적 ‘표준설계’ 에 선주들 외면, 한국조선업 역전기회 제공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물동량이 급증하면서 조선산업이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유럽의 강세가 급격히 떨어지고 일본이 부상하게 된다. 그 이유는 선박건조방법의 획기적 변화 때문이었다.

기존 리벳방식(철판을 볼트 류로 연결하는 방법)의 철판 결합방법을 일본은 용접이라는 신기술에 접목시켰다. 당시 용접으로 선박을 만드는 방법은 일부 군함에서만 적용되었는데 일본이 일반선박에 상용화 시킨 것이다. 유럽은 일본의 이러한 공세를 보고서도 재빠르게 용접공법으로 전환시키지 못했다. 노동조합의 극렬한 반대 때문이었다. 리벳기술 조선노동자들은 그들의 생존권을 위해 결사항전으로 나섰다. 결국 유럽 최대 조선 산업단지 였던 말뫼가 5년의 노사분규 끝에 문을 닫았다.

유럽이 노사분규로 몸살을 앓고 있던 그 시기, 일본은 재빠르게 세계 조선시장을 잠식해 나갔다. 때마침 1차 중동 오일쇼크가 터지며 유조선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자 세계 신조선수주 물량을 싹쓸이하며 순식간에 세계조선시장을 휘어잡았다. 일본은 그로부터 20여년을 세계조선시장을 주도하면서 매년 신조선 수주의 50%이상을 점유했다.

일본은 그러나 결정적 실수를 하게 된다. 1970년대 말 석유파동이 닥치면서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설계표준을 만들어냈다. 정형화된 설계표준만 있으면 설계원가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맞춤복’에서 ‘기성복’ 대량 양산 구조로 변행 시킨 것이다. 일본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자국 내 조선소에 대대적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 결과 일본 내 대학의 조선학과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20% 를 밑도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일본조선업의 태동지인 도쿄대학 조선공학부까지 차츰 시들어가면서 설계인력의 충원이 끊겨 버리고 말았다

선주들의 구매 욕구도 일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형화된 설계도면대로 만들어지는 일본의 선박건조는 많은 선주들에게 외면 받았다. 설상가상 일본이 표준설계에 집착한 상황에서 10년이 흐른 1990년대에는, LNG선과 FPSO(부유식 원유생산저장하역시설) 등 고부가가치설비가 세계조선시장을 형성하게 된다. 여기에다 2000년 이후에는 선박의 대형화와 다양화 추세가 뚜렷해지면서 선주의 요구에 부합하는 맞춤설계가 중요해졌다. 결국 새로운 조선산업 시장에 설계인력을 뒷받침 하지 못하고 도크의 대형화를 준비하지 못한 일본의 조선업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한국 재벌들 조선업에 무한경쟁 돌입 -세계 최고의 경쟁력 보유

한국의 조선업은 그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을까. △정부의 산업정책 △재벌중심의 조선산업 육성 △경쟁체제 도입 △자체기술개발 △대대적 조선인력 양성의 5대요인이 성공비결이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에게 지시해 정부와 재벌이 동시에 조선산업에 뛰어들게 했다. 이후 대우그룹과 삼성그룹 등이 경쟁적으로 조선업에 진출했다. 이는 조선기술개발 촉진과 조선 인력의 양적, 질적 팽창을 가져왔다. 조선업 육성 붐은 한국의 국립대학교에 조선해양공학과를 세우게 했고 1990년대 이후 사립대학교에도 조선해양공학과 설립이 계속되고 있다. 유럽이나 일본이 과거 영광에 심취해 인재육성을 등한 시 한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면서 한국의 현대,대우,삼성그룹은 자국내에서 선박수주,기술개발등을 놓고 무한 경쟁에 돌입했다. 1970년대 후반 이미 100만톤 규모의 대형도크를 보유하면서도 독점적 조선산업을 고집하는 바람에 경쟁력을 상실한 대만 조선업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결과는 한국은 조선3사를 세계 1.2.3위 조선사로 키웠고, 대만의 조선업은 몰락했다.

최근에는 한국의 최대강점인 IT통신기술과 조선업이 융합되고 있다. 조선업의 독보적 위치에 IT통신기술이 접목되면서 한국과 타국간에 조선산업 격차가 더욱 크게 벌어지고 있다.

초창기 한국조선업계의 조선기술은 영국, 덴마크, 일본으로부터 이전됐다. 이들 세 나라는 시차를 두고 한국조선업계에 진출했다. 한국조선업계는 의도적으로 세 나라를 경쟁시켰다. 조선소 현장은 다국적군의 기술 집합소였다. 현장의 지도기술 권한은 덴마크, 생산설계기술이 탁월한 일본, 기본설계 권한을 가진 영국 등 3국의 치열한 경쟁구도로 만들었다.

당시 생산현장은 1차 생산을 ‘유럽식’으로, 2차 생산은 ‘일본식’으로 만들어냈다. 여러 기술의 병존은 생산현장의 혼란과 시행착오를 가져왔다. 그러나 실보다는 득이 많았다. 1971년 초부터 1975년 말까지 5년 여간 빠른 속도의 기술 이전은 한국조선업의 자립도를 크게 높였다. 한국조선업은 이들 선진기술의 장점만을 취합하면서 어느 시점, 외국 조선기업들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독자생존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한국조선업계의 기술 습득과정은 눈물겹다. ‘부메랑 효과’를 우려한 일본 조선업계의 핵심기술 이전기피를 극복하기 위해 일부 산업스파이 짓도 불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74년 현대조선은 일본 가와사키중공업에 기술자 2명을 파견한다. 이들에게 내려진 특명은 “뭐든지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모두 가져오라”였다. 가와사키 중공업에 파견된 두 직원은 닥치는 대로 모으고 기록했다. 설계도면, 현장사진, 심지어 몽키스패너까지... 이렇게 모은 자료는 쉴 새 없이 한국으로 보내졌다. “이때 가져온 자료가 한국조선업 기술 촉진에 엄청난 도움이 됐다”고 초창기 현대조선 관계자는 전하고 있다.

결국 한국조선업의 선두주자 현대조선(현대중공업)은 10년 만에 세계1위 조선사로 올라섰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2003년에는 한국조선업계가 명실상부한 세계1위 조선강국으로 우뚝 섰다.

중국의 결정적 실수, 한국 조선업 세계 LNG선 시장 ‘싹쓸이’

 

중국 후동조선소에서 만든 LNG선이 지난해 엔진 결함으로 호주해상에서 멈춰섰다. 수리조선에 들어갔지만 끝내 고치치 못하고 폐선조치 됐다. 곧바로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신은 중국 국영 석유기업 시노펙이 발주할 10척이상의 LNG선이 한국조선업계로 향하고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조선소 건조물량이 한척이라도 아쉬운 중국이 선뜻 자국 내 조선업계를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중국조선소의 LNG선 건조기술을 못 믿기 때문이다.

   한국조선업계의 올해 LNG선 수주량은 현재 전세계 발주량 12척 중 10척이다. 2척은 중국국영조선해양 그룹인 CSSC가 후등중화조선에 발주한 것이다. “눈 딱 감고 준 것이다.”라는 세계조선업계의 반응이다.

카타르 국영석유회사 카타르페트롤리엄도 20여만 톤급 초대형 LNG선 60척 발주를 위해 한국을 노크하고 있다. 카타르페트롤리엄측은 지난 1월말 한국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을 차례로 방문해 LNG선 건조 능력을 조사했다. UAE 가 발주할 초대형 LNG선 25척도 한국 ‘빅3 조선사’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해외 선주들이 LNG선을 발주할 때 제일 먼저 고려하는 것이 선박의 품질과 성능이기 때문이다. 가격과 납기는 그 다음 문제이다. 중국의 후둥중화조선의 결정적 실패는 전 세계 LNG선 선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그 결과 한국이 LNG선 건조시장을 독점하게 됐다.

박기섭기자

 러시아 북극해 자원개발사업인 ‘야말프로젝트’ 관련 쇄빙 LNG 운반선 추가발주도 한국조선업계로 향하고 있다. 쇄빙 LNG선은 얼음을 깨면서 운항하는 가스선으로 보통 LNG선 가격의 2배에 달하는 척당 3억 달러가 넘는 고부가선박이다.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러시아 국영회사 노비텍은 한국 대우조선해양과 물밑 접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조선해양은 2014년 ‘1차 야말프로젝트’ 당시 15척의 LNG운반선을 싹쓸이 한 실적이 있다. 특히 대우조선해양은 LNG선의 핵심기술인 ‘PRS(증발가스 부분 재액화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어 수주 경쟁력이 앞서 있다.

LNG선 발주량은 향후 10년간 480척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LNG 수요를 물동량으로 계산한 수치이다. 이러한 LNG선 수요급증은 선박가격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 척당 평균 1억 8200만 달러에서 올해 2억 달러 가까이 발주될 것으로 전망된다.

LNG선 수주 독점에다 선박가격까지 상승하고 있어 한국조선업계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프리마미디어 한국 특파원 박기섭 기자 (ajr328@naver.com)>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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