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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소리]'25년 지역언론 심중소회(心中所懷)'

기사승인 2019.12.08  20: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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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생마사(牛生馬死)의 지혜와 지역언론의 역할'

언론은 고발로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것'

같은 지역언론사 후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쓴 보도기사로 행정기관이 언론중재를 요청한 사건을 바라보며 위로의 말로 건넨 말이었다. "사장님 혼자서 그렇게 한다고 해서 거제사회가 변해지는 것도 아니고, 혼자만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받고 있으니 노년에 외롭게 살 필요가 있느냐" 며 우려 반 위로반의 말을 했다. 그런데 그 위로가 왜 나에겐 비아냥거리는 일로 생각되는지 매우 불쾌했다. 더욱이 그가 다른 직업인이었더라면 언론을 잘 이해 못하는 탓이라고 조금은 나았을 텐데 같은 지역에서 언론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듣는 말이라 곱씹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류의 대세인 큰 물결 속에 함께 흘러가며 살지, 잘나지도 못하면서 유독이 거센 물결에 혼자 역류하려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속 깊은 뜻이 있는 말로 들렸다. 어쩌면 나를 위한 진정한 위로이고 충고일 수도 있는데 왜 나는 이를 수긍하지 못할까.

수년 전에는 아침 일찍 한 여성으로 부터 '똥 세례를 안기고 말겠다.'는 폭언전화로 하루를 시작한 일도 있었다. 그런 탓에 종일 마음이 무겁고 개운치 못해 불편했다. 지역 언론에 종사한다는 것이 결코 화려하지도, 재물을 모아 가족들로 부터 가장노릇을 제대로 잘 한다는 평가도 받지 못하는 존재이건만 '저널리즘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다른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에 괜스레 죄인인 냥 앞에 나서는 일에는 주저하기도 했다. 그 이전에 이 여인의 남편으로부터 폭언도 있었기에 더 그랬다. "검찰청 앞이다. 고발할 것이다. 돈이 얼마가 들어가더라도 결코 그만 두지 않겠다." 는 거의 협박성에 가까운 말까지 했다. 정말 내가 그렇게 못할 기사를 쓰는 기자일까? 나의 그림자를 다시금 되돌아보기도 했다. 그런 세월이 벌써 25년을 훌쩍 넘겼다.

삶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까지 왔지만 나는 아직도 컴퓨터 기판을 두드리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이런 항의성 전화도 잦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신문에 실리면 진실한 해명이나 기자도 신이 아니니까 반론요구를 할 수도 있으련만 오히려 협박성에 가까운 폭언으로 전화질을 한다. 얼굴을 보지 않는 전화라는 방패막이 있기 때문인 거 같다. 물론 그런다고 내가 크게 달라 질 것은 없지만 그저 우울하고 마음이 불편하다. 주장하는 내용이 절대로 내가 동의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에 기초하지만 어쩐지 내가 못할 짓을 한 죄인인 듯하다. 가능한 인간적 이해로 노여움을 달래고 싶지만 그들과 '저널리즘의 본질이 어떻고, 도덕적 흠결이나 윤리가 설 땅을 논할 수도 없다. "뜻대로 하고픈 대로하라'는 결론이니 더 안타까울 때가 많다 이렇게 궂은 일, 즐거운 일, 슬픈 일들 속에 거제언론에 몸담기 25년을 지난 것이다.

예전 칼럼에 인용했던 '우생마사(牛生馬死)'를 생각한다. 이 사자성어는 삶의 한 교훈으로 모 선배가 가르쳐 준 말이다. 아주 커다란 저수지에 말과 소를 동시에 밀어 넣으면 둘 다 헤엄쳐서 뭍으로 나온다. 말은 헤엄 속도가 훨씬 빨라 거의 소의 두 배 속도로 땅을 밟는데 같은 네발짐승임에도 소는 늦다. 그래서 소처럼 미련하다는 말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장마기에 큰물이 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갑자기 불어난 물에 소와 말을 동시에 던져 보면 소는 살아서 나오는데, 말은 익사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말은 헤엄은 잘 치나 강한 물살이 떠밀면 그 물살을 이겨 내려 물을 거슬러 헤엄치려 한다. 1미터 전진하려다가 물살에 밀려서 다시 1미터 후퇴를 반복 한다. 한 20분 정도 헤엄치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제자리에서 맴돌다가 지쳐 익사한다. 그런데 소는 절대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그냥 물살을 등에 지고 같이 떠내려간다. 저러다 죽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10미터 떠내려가는 와중에 1미터 강가로 10미터 떠내러 가다가 또 1미터 강가로 그렇게 반복하다가 어느새 강가의 얕은 모래밭에 발이 닿아 엉금엉금 걸어 나온다. 헤엄을 두 배나 잘 치는 말은, 물살을 거슬려가다 죽고, 헤엄이 둔한 소는 물살에 편승해서 조금씩 강가로 나와 목숨을 건진다는 뜻이다.

삶을 살다 보면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릴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일은 아무리 애를 써도 꼬일 수 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일 때 주변의 정황이 대세가 되어 큰 물줄기가 되어 흐르면 그 흐름을 거스르지 말고 소와 같은 지혜를 가지라고 한다. 모든 세상사나, 수없이 진행되는 정책들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그 평가는 판이하게 다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 입장에 따라서 더 그렇다. 하지만 거기에도 정도라는 것이 있고 원칙과 공공선(善)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랏일이나 지역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는 우생마사를 느낌은 왜 일까?

그럴 때 나는 언론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 자신을 되돌아본다. 정말 좋은 게 좋다고 주변과 함께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언론이라는 직업인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들이라며 세상 모두가 작은 허물 정도는 덮어 두고사는 게 시대의 대세인데 함께 녹아들지 못하는가? 예전에도 칼럼에서 '민의는 외면 한채 제 속 채우기에 급급하고도 시민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느냐고 주장하며 아래와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삐딱소리'라는 칼럼 때문에 순해 보이던 사람이 요새는 영 삐딱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 취급을 받을 때가 있어 신경이 쓰이고 때론 안타깝다. 그러나 상대방을 굳이 골라서 흠집 내기 하려는 의도는 아니 것만 기사내용이 독침 같은 내용일 때가 있어 욕을 많이 먹는다. 그러나 내가 택한 길이니 계속 가야지 어쩌겠는가. 참고 견디는 도리 밖에. 읽어서 편안해지고 싶다면 성경이나 불경을 보라고 권하겠지만 부더러움이나 강직함은 고사하고 비판이 직업인 이상 '고양이 방울 역'을 맡아야 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견제가 없으면 폭군이 되는 법이고 구린 게 많아 비밀과 적당이 장기인 인허가 업무에선 더 말할 것도 없다. 글자 하나를 무기삼아 빠져 나가는 게 속성 아닌가. 언론이 '아니다'고 하는 소리는 비밀과 적당으로 치장해 넘기려 할 때에 절대 필요하다. 따라서 공직자에게 언론이 싫은 소리해도 미운털 박히지 않게끔 제도적으로 인정해 주는 건 정말 중요하며 그 소리하라고 시민에게서 위임 받은 게 언론의 본능이 아닐까. 조선시대 경국대전이 언관의 눈을 통해 절대 권력자인 임금에게 간언하도록 사간원을 둔 정신이 언론자유를 규정해 둔 오늘과 같았으리라. 언관(言官)은 면전에서 왕의 잘못된 주장을 꺾는 면절(面折), 뜰에 서서 소리쳐 바로잡는 정쟁(庭諍), 궁궐의 난간을 부러뜨리면서 간언하는 절함(折檻)을 해도 면책특권을 받았다. 이게 싫어 사간원을 없애 버린 연산군은 폭군으로 기록됐다. 언론이 이처럼 특별한 대접을 받는 건 그 사람이 잘나서가 아니다. 감시견 노릇을 잘하라는 이유다. 코드가 같다고, 국물 좀 먹겠다고 이걸 안하고 못하면 언론이랄 수 없다. 알 권리를 위임한 시민에 대한 배신이다. 따라서 언론은 폭로라는 힘으로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것이다. 폭로될 우려만으로도 권력 남용은 줄 수 있다. 언론자유 없이 민주주의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모든 게 잘되고 있다며 무사안일에 빠질 때 송곳으로 찌르는 지적이 더 필요하다. 따라서 긍정보다 부정 쪽에 글 수가 많은 것도 그 이유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어떤가? 고개를 흔든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하자는 각오를 하면서도 꼭 이런 불편한 진실 앞에선 나 또한 보통 사람일 수밖에 없는 감정을 속일 수 없다. 지역신문의 성패는 시장주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경쟁력 없는 소통의 소멸정도에 불과하지만, 민주주의 관점에선 중요한 여론매체의 존재일 수도 있다. 신문은 분명히 다른 매체와 달리 심층적이고, 종합적인 여론 전달매체 기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제대로 된 지역신문은 사회적 기능을 다할 수도 있다. 이제 지역민들의 지역 언론에 대한 인식도 전환되어야 할 시점이다."혁명의 불길과도 같은 뉴미디어의 변화 속에서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 기자정신"임을 다시 생각하며 옷깃을 여민다. 미국을 대표하는 양심이자 '신문의 신문'으로 평가받는 뉴욕타임스도 인종주의 편견이나 돈의 지배 앞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도 경영을 위해 인터넷으로만 보도한다. 결국 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다. 따라서 다 함께 사는 세상이기에 언론종사자의 고뇌는 깊다. 사법기관이 ‘법과 질서’의 눈으로 ‘사건’을 다룰 때, 기자는 ‘인간과 정의’의 눈으로 ‘사람’을 만난다. 거기서 기사를 길어 올려야 하기에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권력자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기 쉽다.

시민사회의 대표를 ‘자임’한 기자는 시민의 눈으로 권력의 부패와 전횡을 감시하고, 기사로 폭로하여 경종을 울리는 것이 사명이다. 고급정보가 오가는 길목인 권력기관은 비밀스런 문서와 음험한 이야기들이 횡행해 기자들은 묻힌 진실을 캐낸다는 의미로 언론의 존재이유를 망각하지 않고, 날 서린 비판의 눈으로 권력자들을 감시한다. 시민의 눈으로, 시민들의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권력을 향해 따져 묻는 탐사·기획·심층 보도는 원래 기자들의 몫이다. 그런 사람에게 똥 세례를 퍼붓겠다고 까지 하는 세상이니 참 기차다 무수한 세월이 흘렀건만 이런 글을 다시 반추하는 이유가 있다. 오늘날 이 나라, 이 지역사회 현상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에 그저 허탈할 뿐임을 느끼는 탓이다. 사람들만 바뀌었을 뿐 우리 사회는 그대로 인 것만 같아서 더 씁쓸하다. 정치권력이던 경제 권력이던 일상생활과 지역발전에서 보면 사람들만 일부 바뀌었을 뿐 그대로 이고, 그들의 영향력에는 개혁이나 변화가 별로 없다. 소수의 지도층들이 정직하지 못하거나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면 우리사회는 희망이 없다. 그래도 세월은 가기 마련이라 하겠지만 나는 말(馬)처럼 시류의 대세를 역행하다가 죽는 사고를 당하더라도 제대로 된 말을 하다가 죽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지역 언론인으로 살다가는 명예로움이 아닐까?

 

 

 

 

 

 

 

박춘광 기자 gjtline@naver.com

<저작권자 © 거제타임라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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